이백순 율촌 고문 인터뷰① "외교의 최우선 목표는 생존"

이상우 승인 2024.04.21 07:00 | 최종 수정 2024.05.01 12:54 의견 1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사진 왼쪽)과 박종국 뉴스임팩트 편집국장이 대화하고 있다.@뉴스임팩트

[뉴스임팩트=박종국·이상우기자] 세계 정세가 갈피를 잡기 어렵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이란과도 전쟁을 벌일 태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대만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며 벼르고 있다. 미얀마에선 군부와 저항 세력이 팽팽히 맞선 채 교전하고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사이에 낀 한국으로선 험난한 세계 정세를 헤쳐 나가기 위해 현명한 외교를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현명한 외교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한미동맹에 대해선 어느 정도 컨센서스(consensus·공동체 구성원 간 합의)가 있지만 중국을 어느 정도 배려해야 하는지, 일본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게 국익에 부합하는지, 러시아와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야 하는지 같은 쟁점을 둘러싼 논쟁은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어떤 논쟁이든 하나 마나 한 말싸움에 그치지 않으려면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의 의견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현장이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야 해법을 도출할 수 있어서다. 뉴스임팩트가 30년 이상 외교 현장을 누빈 이백순 법무법인 율촌 고문을 만나 한국 외교의 나아갈 길에 대해 들었다.

이백순 고문은 1959년생으로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나왔다. 외무고시 1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외교부 인사기획관과 북미국장, 주미얀마 대사, 국회의장 외교특임대사, 주호주 대사를 지냈다.

이백순 율촌 고문.@뉴스임팩트

ㅡ외교관은 말쑥한 신사처럼 보이지만 양복 입은 군인, 공인된 스파이란 별명이 있을 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직업이다. 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했는데 굳이 외교관을 택한 이유가 있나.

"어릴 때 적성 검사를 받았는데 소설가 아니면 외교관이 맞다고 나오더라. 문학을 좋아하긴 했지만 직업 선택은 다른 문제니까 외교관을 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대학에서 외교학을 부전공하면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해 보니 재밌었다. 그래서 학문의 길을 갈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문적 열의가 꺼진 채 정치에 한눈을 파는 몇몇 학자들을 보면서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외무고시를 봐서 외교관이 됐다."

ㅡ외교관을 해보니 어떤 자질이 가장 중요하던가.

"남과 잘 어울리고 떠돌이 생활을 참아낼 수 있는 애티튜드(attitude·태도)다. 애티튜드가 없는 사람이 외교관이 되면 먼저 본인이 힘들고 속한 조직인 외교부까지 갑갑해진다. 예컨대 외교부에 외교관보다 검사를 하는 게 나아 보이는 이들이 있다. 논리 규명, 비판, 지적 좋아하는 사람들 말이다. 외교관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면서 완곡한 표현으로 반박할 줄 알아야 한다. 너무 조용한 사람도 외교관으로 맞지 않는다. 외교관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도시에 가서 모르는 사람을 친구로 만들 줄 알아야 한다. 인간관계 형성에 서툰 이는 외교관보다 학자를 하는 게 낫다."

ㅡ애티튜드 외에 필수적 능력이 있다면 무엇인가.

"외교관은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모든 분야에 상당한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여야 한다. 누굴 만나든 화제가 막히면 안 된다. 그러면서 주어진 업무에 대해선 스페셜리스트(specialist·전문가)처럼 깊이 들어가야 한다. 2006년에 제가 미국 정부의 원자력 담당 국장을 만난 적이 있다. 통상적으로 관료가 우호국 외교관을 만나면 브리핑을 해준다. 그런데 이 국장은 대번에 '당신이 아는 만큼 대답해 주겠소'라는 태도를 보이더라. 여기서 할 말이 없으면 면담은 그냥 끝난다. 다행히 제가 한미 원자력 협정, 미국·인도 원자력 협정 개정에 대해 공부하고 갔기 때문에 충분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관료뿐 아니라 학자든 여론 주도층이든 마찬가지다. 해당 국가에선 다 콧대 높은 사람들 아닌가. 외교관을 만났을 때 이 사람 뭘 좀 안다, 들을 만하다 싶을 때 만나주는 거다. 또 볼 필요 없겠다 싶으면 핑계 대고 연락을 안 받는다. 두 번 세 번 만남을 거듭해야 알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사진 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출처=연합뉴스

ㅡ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외교 정책은 어떻게 평가하나.

"대통령은 외교의 커맨더 인 치프(Commander in Chief·최고사령관)다. 우리나라 대통령 모두 나름대로 잘 해보려는 의지를 갖고 외교를 해왔다고 본다. 다만 시대의 흐름을 읽고 결기 있게 외교 정책을 택하는 담력이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경향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의 경우 한미일 협력 중시 같은 방향성은 잘 잡았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균형 외교를 할 수 있는 정세가 아니다. 미중 디커플링(decoupling·분리)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외교 정책에 불변의 해답이 있는 건 아니다. 나침반이 북극을 향해 움직이듯이 외교도 국익이 어디에 있는지 보고 변화해야 한다. 아울러 외교 정책을 바꿀 땐 속도도 고려해야 한다. 골프에서도 방향 못지않게 스윙 속도가 중요하잖나. 윤석열 정부가 한미일 협력 강화를 너무 급하게 추진한 것 아닌지 되새겨봐야 한다."

ㅡ한미일 협력에서 쟁점은 결국 한일관계다. 한일관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한다고 보나.

"일본이 우리 국익에 부합하는 파트너는 맞다. 그렇지만 핵심 쟁점인 과거사 문제를 우리가 양보하는 형태로 처리하면 안 된다. 변화하는 일본 외교 정책을 감안할 때 과거사는 한일 두 나라의 시빗거리가 아닌 세계적 이슈로 만들어야 한다. 국제회의 같은 데서 다른 나라들이 한일 과거사를 떠들게 해야 한다는 거다. 유태인들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들은 홀로코스트 영화나 소설을 많이 내서 세계인들이 유태인 학살을 다 알게 했다. 우리도 그런 식으로 가야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사진 왼쪽)과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출처=연합뉴스

ㅡ좌파 외교, 우파 외교 따질 것 없이 국익 외교를 하자는 말로 들린다.

"그렇다. 이념을 중시하는 좌파 외교, 원칙을 내세우는 우파 외교 모두 문제가 있다. 자유민주주의라는 대전제 하에서 외교는 생존, 번영, 가치의 3가지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 3가지를 모두 잡으면 좋지만 난세일수록 그렇게 안 된다.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최우선은 언제나 생존이다. 두 번째가 번영, 가치는 마지막이다. 이를 유의하면서 외교 정책을 짜야 한다."

"또한 외교는 선의로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외교관이 특정 국가를 오랜 기간 맡으면 해당 국가에 너무 가까워지는 경우가 있다. 외교부 내에 친미, 친중, 친일이 나뉜다는 소리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남 입장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외교로 어떻게 국익을 추구할 수 있겠나. 아무리 친한 국가여도 필요한 경우 이빨을 드러낸다는 각오를 지니고 외교를 해야 한다. 정 안되면 협박조로 말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미소를 짓는 것만이 외교가 아니다."

ㅡ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 이상의 합의를 하긴 어렵다. 문재인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파기하지 말고 발전시켜 나갔어야 했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국가 간 합의를 뒤집어버리니 일본이 '한국은 골대를 자꾸 옮긴다'라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니 강제 징용 이슈가 제기돼도 얻는 게 없잖나."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사진 왼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출처=연합뉴스

ㅡ문재인 정부 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난 이유는 뭔가.

"트럼프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체제 유지와 번영을 보장해 주는 빅딜을 하려 했다. 북한은 트럼프의 빅딜 의지가 강하다고 여긴 나머지 우라늄 시설을 숨기는 등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바라봤다. 그러다가 존 볼턴 전 미국 국가 안보 보좌관이 하노이(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베트남 수도) 협상장에 나타났다. 볼턴은 초강경파이자 미국 국익의 화신 같은 이다. 협상 둘째 날 볼턴을 본 순간 판이 깨지겠다 싶었고 그대로 됐다."

"지금 돌이켜 보면 북한이 아쉬운 판단을 했다. 영변(평안북도 영변군) 핵시설에다 강선(남포특별시 천리마구역 고창리) 핵시설까지 내어놓고 미국과 빅딜을 해야 했다. 예상과 달리 나오는 미국에 북한이 실리를 추구하지 않고 경직된 태도를 보이니 협상이 성사될 수가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과 정의용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트럼프와 김정은 양쪽에 정확한 상황 설명을 하지 않은 것도 협상을 꼬이게 한 원인이다. 중차대한 국가 운명이 걸려 있는 데도 장밋빛 전망 조성에만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ㅡ우리가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북한은 일종의 종교 국가다. 일반적인 국가와 같은 기준으로 봐선 안 된다. 경제가 어려우니 북한이 붕괴할 것으로 예측하는 건 북한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거다. 북한은 내구성이 강하다. 급변 사태에 의해 갑자기 무너질 순 있겠지만 버티는 힘이 있는 국가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우리가 북한과 통일하려 하면 갈등만 깊어진다. 당분간 잊고 지내자, 떨어져 살자고 해야 한다. 적어도 30년은 통일을 포기하고 관계를 관리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다. 젊은 시절 외교관이 됐을 땐 통일에 힘을 보태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젠 통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이 안 나면 다행이다. 그만큼 북한과 우리는 멀어져 있다."

ㅡ북한이 우리를 선제공격할 가능성은 있나.

"최악의 경우지만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전면전까진 아니어도 제한전은 김정은이 충분히 결단할 수 있다. 1953년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정한 북방한계선(NLL)엔 국제법적 지위가 없다. 북한도 이를 알고 있다. 북한군이 NLL 주변 섬을 점령해 수도권을 위협하는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은 없다. 제한전이라면 미국은 참전을 꺼릴 거다. 그때 과연 우리 대통령이나 장군들이 북한군에 맞서 싸우라고 돌격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럼 어떤 대안이 있는지 우리 사회가 고민해 봐야 한다."

(다음 기사에서 계속)

저작권자 ⓒ 뉴스임팩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