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가을 단풍 구경 좀 할까 싶어 멈칫거리니 이른 겨울 추위가 얼어오는 듯한 몸을 움직이게 한다. 오르막길 내치면 덜 추울지도 몰라 좁은 숲길로 턱턱 오르니 수북하게 쌓인 숲속 낙엽 더미가 온기를 전해오는 듯하다.
솜이불처럼 땅을 덮은 따뜻한 풍경 위로 북풍이 지나간다 해도 땅속 뿌리는 낙엽의 보살핌으로 얼지 않고 새봄을 차분하게 맞이할 것이다. 낙엽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간 서러움을 잊고서 먼 훗날 거름으로 보탬이 된다는 뿌듯함까지 끌어안으며 최선을 다해 숲을 데울 것이다. 그렇게 겨울숲은 한파에 굴하지 않고 생명을 움터 나가고 있다.
자연 그대로의 숲 끝자락에서 북서울꿈의숲 경사진 벌판과 인공 건축물들이 나타나고 있는 순간, 여전히 푸른 잎과 그 소명을 다하고 갈색으로 단풍이 들고 있는 나뭇잎이 공존하고 있는 갈참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곧 단일한 색으로 변해갈 모습을 상상하다가 그 앞 나뭇잎을 달고 있는 가지에서 솟아 오른 겨울눈이 장엄하게 다가온다.
여러 겹의 눈비늘 조각이 포개져 잎과 꽃을 보호하고 있는 뾰족하면서도 둥근 모양이 빗살무늬토기 같아 신기해 보이기도 하지만, 새끼손가락 손톱보다 작은 듯한 이 겨울눈이 내년에 펼칠 생명력을 품어보면 외면보다 내면의 기운이 얼마나 드세고도 꿋꿋한지 그 강렬한 생각을 멈출 수 없다.
<겨울나무의 시간>에 나오는 글을 보자.
“겨울나무에 있는 동그란 점은 나무가 내년을 위해 응축시켜 만든 겨울눈이다. 겨울눈은 하나의 세계다. 이 세계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시작이다. 응축된 점은 선이 되어 뻗어 나가는 순간을 기다린다.
봄이 되어 뻗어 나온 가지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촉촉한 선은 길어지고 단단해지며 1년 동안 나무를 위해 잎을 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리고 또 새로운 점들을 만들 것이다.
선으로 뻗어 나간 가지에 나이테가 더해져 면으로 굵어지면 나무는 비로소 나무다워진다.”
활엽수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헐벗은 몸이 되지만, 눈을 부릅뜨고 보면 보이는 겨울눈을 통해 갖출 건 모두 갖춘 꽉 찬 내일의 나무들을 상상할 수 있는 굳건한 순환의 예지력, 어떻게 해야 체화시킬 수 있을까? 방법은 간단할 것이다. 사계절 내내 나무에 관심을 갖고 열심히 보고 또 보면 된다는 정말 단순한 방법 말이다.
숲의 경계를 넘어 놀이공원에서 녹지공원으로 변모한 북서울꿈의숲을 거닐어 본다. 아직도 이곳이 드림랜드라는 이름을 갖고 노는 걸로 기분 전환을 도모하는 공간이었다면 어땠을까? 죽은 듯이 겨울을 나면서도 결코 죽지 않고 새 생명을 잉태하고 있는 겨울숲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에 맞춰 진화하려고 온갖 몸짓을 해대지는 않았을까?
그러면 겨우내 잎을 달고 나는 갈참나무를 비롯한 몇몇 활엽수들은 차가운 허공을 가르는 환호성에 못 이겨 차라리 잎을 떨어뜨리는 획기적인 생태 혁명을 추진하지는 않았을까? 그 찰나일지도 모르는 연대에 들어선 도심 속 거대한 녹지공원 북서울꿈의숲, 그 겨울의 풍경을 회상하려고 슬쩍 뒤돌아보며 생각을 이어간다. 그러고는 나무에 관심을 가져야만 전해져 오는 기이하고도 난해한 풍경을 곱씹어본다.
활엽수는 가을이 되면 낙엽이 된다. 그런데 활엽수이면서도 겨울숲에서 갈색 잎으로 지난하게 겨울을 나는 나무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게 참나무들이다. 그 이유가 궁금해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대부분 가설이다. 그 가설을 세 가지 펼쳐놓은 <참나무라는 우주>라는 책을 보자.
첫째 가설이다. 참나무가 겨울에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현상을 둘러싼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은 사슴, 말코손바닥사슴. 와피티사슴 같은 목본식물의 가지 끝을 먹는 초식동물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클라우스 스벤센(2001)은 영양가 높은 식물의 눈(잎이나 꽃이 될 새싹) 주위에 마른 이파리가 남아 있으면 초식동물이 그것을 먹을 때 영양가로나 맛으로나 모든 면에서 끔찍한 죽은 이파리까지 한 움큼 먹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즉 남은 이파리가 초식동물의 식욕을 망쳐 겨울눈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둘째 가설이다. 나뭇가지에 죽은 이파리가 달려있으면 바람이나 작은 움직임에도 바스락 소리가 나서 항상 포식자의 동태를 살펴야 하는 가여운 유제류(有蹄類, 사슴, 노루 등 발에 발굽이 달린 동물)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고 한다. 즉 남은 이파리가 초식동물의 접근을 막아 겨울눈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셋째 가설이다. 남은 잎들이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는 참나무의 성장을 돕는다는 것이다. 겨울에도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마른 잎들 덕분에 가지 위로 눈이 많이 쌓여서 나무의 성장 속도가 빨라지는 봄에 흙속 수분의 양이 늘어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잎은 겨울에 모두 나무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분해 속도가 매우 느린데, 나무가 가장 필요로 하는 봄에 바닥으로 떨어져 영양분이 풍부한 뿌리덮개 역할을 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은 가설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완벽하게 설명하기 위해 연구하지만 자연 현상은 단 한 가지 이유가 아닌 다양한 원인의 복합적 작용에 의해 벌어지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더 타당할 뿐이란다.
“생태학은 첨단과학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까다롭다.”
전문가들도 가설로만 이야기하는 잎을 달고 겨울을 나는 활엽수 현상, 더는 심도 있게 확장할 기운도 없어 잎이 다 진 왕벚나무 겨울눈에 눈길을 준다.
가운데 뾰족한 잎눈과 양옆 덜 뾰족하면서도 둥글게 보이는 꽃눈에 빠져들자마자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이 썰물로 나가고 따스한 봄바람에 화려한 벚꽃놀이가 신나게 벌어지는 것 같다. 모든 게 착각이고 환상이지만 마음은 미처 오지 못한 봄에서 놀고 있는 듯해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월영지 주변을 걸어 들어간다.
달빛은 밤에 내리는 법, 햇빛이 물속으로 스며드는 곳곳에 물억새 흰빛이 그림물감처럼 풀어지고 있다. 그 한쪽에 핫도그 모양의 열매를 달고 있는 부들이 허기를 부추기고 있고, 그 끝에 외롭게 서 있는 낙우송 한 그루에 멈춰 서서 아래로 고개를 숙여본다. 둥글면서도 기다란 돌출 뿌리를 보기 위해서다. 작지만 보인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낙우송 뿌리가 물 바깥에서 땅 위로 나오는 건 부족한 숨을 쉬기 위해서다. 이를 호흡 뿌리 혹은 무릎 뿌리라고도 부르는데 가까이 보면 사람의 무릎과 많이 닮아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호흡을 한다기보다 물가 주변 지반이 약하니 그곳에서 잘 자라기 위해 나무 주위에 나와 버팀목 같은 역할을 한다고도 추정을 하고 있다. 역시 가설로 보이는 자료에서 낙우송 뿌리가 주는 현상은 뒤로 미루고 이름으로만 나무를 알아본다.
낙우송은 미국 미시시피강 하류가 원산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1920년대에 들어오기 시작했단다. 이름을 보면 떨어질 낙(落), 날개 우(羽), 소나무 송(松)이긴 한데 소나무와는 아무 관련이 없고 잎도 소나무보다 삼나무에 가깝다.
낙우송과 비슷한 나무는 메타세쿼이아이다. 가장 분명한 구분법은 열매이다. 낙우송 열매는 지름이 2~4센티미터로 공 모양이고, 메타세쿼이아 열매는 솔방울 모양 같다. 불규칙한 삼각형으로 보이는데 지름이 14밀리미터에서 25밀리미터로 낙우송 열매보다 작다.
고독한 풍경을 떠나 물가에서 조금 벗어나니 황톳빛 낙우송 낙엽이 푹신푹신 밟힌다. 여기서 또 머리가 아파온다. 측백나무과로 분류된 낙우송, 즉 상록수이지만 가을의 낙우송은 잎을 떨어뜨리고 맨몸으로 겨울을 난다. 활엽수 참나무와 위치를 바꾸어야 될 것만 같다.
첨단과학보다 까다롭다는 생태학, 모든 걸 비우고자 전망대로 향하는데 아뿔싸 월요일은 쉰단다. 그렇지, 생물이든 비생물이든 쉼이 필요하지. 쉬면서도 순환의 생명을 역동적으로 준비하는 겨울숲과 겨울눈, 그 여정을 계속 눈에 담으면 더 나은 봄이 기다리고 있겠지. 겨울숲을 걷고 또 걸으면.
[김서정 작가 소개]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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