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연꽃을 재배했다는 관곡지와 이를 기리고자 확대해 조성한 연꽃테마파크를 식물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깊게 살펴보려면 아무래도 연꽃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연꽃은 연꽃과 여러해살이 수초(水草)로 수생식물(水生植物)이다. 이는 연꽃이 진흙에서 자라 꽃을 피우는 게 아니라 물속에서 자라 꽃을 피운다는 말이다. 흐르는 물보다 고인 물, 즉 연꽃을 심은 못인 연못에서 자라도록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국립생물자원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수생식물은 130종류쯤이다. 수생식물은 보통 생태적인 습성에 따라 침수(沈水)식물, 부유(浮游)식물, 부엽(浮葉)식물, 추수(抽水)식물 등으로 구분한다. 침수식물은 잎이나 줄기 같은 영양기관이 물에 잠겨 있는 식물로서 검정말, 나사말, 말즘 등이 포함된다.
부유식물은 수중이나 수면에 떠돌아다니며 사는 생이가래, 개구리밥, 참통발 등이 속한다. 침수식물, 부엽식물, 추수식물과는 달리 뿌리를 땅에 고정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추수식물은 물가에 자라는 식물로서 갈대, 부들, 산부채, 줄, 창포 등이 포함된다. 부엽식물은 가시연, 노랑어리연, 연, 순채, 수련, 마름, 어리연처럼 수면에 떠 있는 잎을 가진 식물이다. 그러니까 부엽식물인 연꽃은 잎만 수면 위에 있지 일부 줄기와 뿌리는 물 밑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연꽃은 불교를 상징한다. 부활, 재생, 청정의 의미가 있는 연꽃은 오탁악세(五濁惡世, 혼탁하고 악한 세상)에서 깨끗하게 산다는 걸 의미한다. 진흙은 더러운 것으로 연꽃은 깨끗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꽃이 정화의 의미를 갖는 건 진흙에서 피었다기보다 연꽃 자체가 그곳의 오염 물질을 흡수하여 물을 깨끗하게 하는 자정 작용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정신적으로 고매한 가치를 부여받고 있는 연꽃은 일상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는 식재료다. 연밥과 연차, 연근으로 쓰여 버릴 것 하나 없어 보인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연꽃이 사람에게만 특별하게 보이는 건 오로지 우리의 생각일 뿐이고 생태계로 보면 그 존재만으로도 위대하다.
월간가드닝 자료에 따르면 연꽃은 다른 생물들에게 많은 것을 나누어주는 자선사업가 역할을 한단다. 오래된 연줄기는 물닭과 같이 수생 생태계 공간에서 살아가는 조류들의 둥지를 만드는 재료로 활용이 되고, 연잎은 산란을 앞둔 곤충들의 놀이터이자 보육실이며 또한 작은 조류들의 착륙장 역할을 한단다. 물속 땅에 자리 잡은 연근은 우렁이나 새우들의 먹이 공급처가 되기도 하고 말이다.
1억 년 전 지구에 등장했다는 수련과 그 먼 친척인 연꽃은 왜 고인 물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을까? 그 비밀은 아직 밝혀지지 못했지만, 연꽃 종자는 물 위에 떠다니다가 흙을 만나 발아를 하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특히 고온성 식물로 진화해 물의 수온이 높지 않으면 발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흐르는 물에 살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고인 물은 대부분 썩은 물이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유기물이 풍부한 전형적인 습지의 형상을 갖추고 있다. 부족한 산소는 물 밖으로 솟은 넓은 연꽃잎이 산소를 모아 공기가 잘 흐르는 통기조직을 통해 연근으로 공급하면 된다.
목련처럼 큰 꽃잎을 가지고 있는 연꽃은 원시적인 꽃잎이다. 꽃잎이 크면 에너지가 많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이 틀 때부터 해가 뜨기 전까지 큰 꽃잎이 피어나는 소리가 작게 탁탁 난다고 한다. 이를 청개화성(聽開花聲)이라고 하는데, 연꽃 매력에 빠진 이는 불교도가 아닌 선비들이었다. 여기서 연꽃은 유교와 불교를 넘나드는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꽃 그 자체로 사람과 교감하게 된다.
연꽃을 보러 많은 사람이 찾는 시흥 연꽃테마파크와 마을 길 하나를 두고 있는 관곡지는 조선 세조 때 문신이자 농학자였던 강희맹이 명나라에서 연꽃 씨를 가져와 심은 연못이다.
즉 연꽃 재배 발원지라고 할 수 있는데, 주말만 개방해 안을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발끝을 살짝 올려 낮은 담장 너머로 눈길을 주니 소나무 아래 작은 연못에 연꽃들이 오밀조밀 한가득 있었다.
자신이 가져온 연꽃 씨가 적합한 수온과 산소 환경과 잘 맞아 꽃을 피우는 걸 감상한 강희맹은 조선의 통치 이념인 성리학을 받아들인 선비였을 것이다. 이 말은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게 된 건 아이러니하게도 유학자 때문이라는 것 아닌가.
연유가 궁금해 자료를 찾아보니, 자현 스님의 글이 있었다. 요약하면, 연꽃의 원산지는 인도 쪽이지만 불교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온 연꽃이 풍만함을 선호한 중국인들을 단번에 사로잡았고, 북송 시대 유학자 주렴계가 애련설(愛蓮說)에서 연꽃을 ‘화중군자(花中君子)’로 규정한 뒤 연꽃이 유교에서도 폭넓은 사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연꽃은 ‘처염상정(處染常淨)’이라고 하여, 더러운 곳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학 같은 고아함을 갖추고 있는데, 이 말이 유교에도 불교에도 일반 백성에게도 모두 전해지며 연꽃을 상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관곡지 담장을 따라 걸으며 연꽃테마파크를 보는데, 아무래도 연꽃은 물속에서 자란다기보다 진흙에서 자란다고 인식하는 게 더럽지 않고 깨끗하게 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의식이 세계를 만든다고 했을 때, 모두가 처염상정을 말하는데 굳이 팩트를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 자연 중심 사고를 하려고 애쓴다 해도 그것은 잠시의 전가일 팩트는 아니기 때문이다.
모두가 만든 연꽃 상징에 토를 달지 않고 물방울 스미지 않는 방수 연잎, 벌집 같은 연자방, 보이지 않는 연근을 품고 있는 푸르른 물들을 번갈아 보며 걷는데 그 드넓은 공간을 굽어보고 있는 솟대가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 담고도 한참 바라보았다. 부처가 말한 계율을 확실히 지켜 깨끗한 연꽃 위에 태어난 삶이 장대 위에 솟은 새를 타고 하늘로 날아가야만 과학의 시대에 믿기 힘든 신화 같은 이야기들이 아름답게 완성될 것 같아서였다.
아니 우주나무로 불리는 신목 장대 위 새가 하늘의 뜻을 땅으로 전하고 또 땅의 뜻을 하늘로 전하는 그 순환으로 이어진 삶만이, 아니 우리가 잊었던 그 오래전 자연의 인식만이, 아니 그 인식을 지속하고자 열심히 형상화한 그 행위만이 양산 없이 걸을 수 없는 이 뜨거운 공간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연꽃을 보며 내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그 성찰만으로도 무겁게 걷던 발걸음에서 하늘을 보게 해준 그곳 솟대가 내게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이제는 조상들이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고안해 낸 민간신앙으로만 솟대가 연구되고 있지만, 천지인 합일 사상을 갖고 있는 솟대는 지구 기후 위기를 구할 상징적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우리만, 우리의 세상만 바라보는 인식 세계에 빠져 있는 편협성을 고쳐 나갈, 이미 있는 순환의 사상 솟대, 그 솟대가 굽어보고 있는 연꽃 사이를 뜨겁게 걷고는 길로 나서는데 방역차가 내뿜는 흰색 연기에 갇혀버린다. 깨끗하게 살라고 주문한 연꽃, 하늘과 땅의 이치를 잊지 말라고 알려주는 솟대, 그 존재들이 준 잠시의 깨달음이 안개가 되어 버린다.
그래,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우리만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도 다 과학 덕분 아닌가? 소독 냄새가 숲으로 날아간 뒤 다가오는 마을버스에 안도의 숨을 내쉬는 건 진정 돌이킬 수 없는 인지상정인가. 그래도, 그럴 때마다 식물을 보며 하늘처럼 땅처럼 살아야 하는데. 어렵지만 보고 또 보고 가고 또 가보자. 하늘과 땅 사이 식물들이 있는 곳으로.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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