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작가]서울 구로구 항동 푸른수목원 관리사무소 옆 탁자들이 놓여 있는 쉼터,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생명들이 넘쳐나는 저수지를 바라본다.
5월의 햇살이 다소 뜨겁게 스며드는 물가에 가지 않고도 생명감이 느껴지는 건 이곳 방문이 세 번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짙은 댕강나무 꽃향기가 후각을 깊게 자극하는 것보다 댕강나무라는 나무가 있다는 것에 놀라는 지각이 더 피부를 후벼팠던 숲해설가 초기 시절의 답사, 그리고 그 어느 겨울 탐조를 한다고 아침 일찍 새에게만 시선을 주었던 기억, 그뒤 온몸에 새겨진 건 푸른수목원은 사람이 꾸며 놓은 최고의 녹지 쉼터라는 생각이었다.
두 번 간 곳을 또 간 건 장애인 숲체험 프로그램 자원봉사를 위해서다. 그분들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붙박이로 있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들, 그러니까 자유스러우면서도 군인 행렬처럼 정돈된 듯한 간격으로 걸어가는 유치원 아이들, 삼삼오오 호탕하게 웃으며 유유자적하는 듯한 가벼운 옷차림의 어른들,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저수지로 향하는 덕후(?)들, 홀로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게 사색의 걸음을 보여주는 이들, 그리고 옆에서 쉬지 않고 움직이며 함박웃음을 이어가는 발달장애인들과 동행자들, 그 모든 게 평화로 정의될 수 있는 건 바로 안정적으로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에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생의 위험한 숲에서 탈출해 안전한 인간의 숲에서 살려는 본능이 알맞게 구현된 서울시 최초 시립수목원인 푸른수목원, 그래서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어 있는 듯하다.
푸른수목원이 조성되기까지 역사를 보면, 먼저 항동이 나온다.
“항동(航洞)의 유래가 된 항골은 마을 지형이 풍수지리학적으로 배 모양이어서 붙인 이름이다. 또한 옛날 이 일대가 바다처럼 물이 많아 배가 마을에 닿았던 곳이라는 데에서 연유되었다고도 한다. ~ 부천에서 항동으로 가려면 배 모퉁이처럼 튀어나온 산등성이를 돌아가야만 하는데 이 모퉁이 근방에 몇 백 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당시 소사의 갯벌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위해 뗏목을 타고 내려오다 이 나무에 배를 매어 두고 정착하면서 마을이 이루어졌다.”
항동저수지에서 생태습지로 변한 곳에는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김서정 작가
이 소개글을 보면 항동의 시작은 느티나무가 된다. 당산목, 수호목, 정자목을 넘어서는 시원적인 이야기에 정감 어린 힘이 느껴진다.
나무가 만든 마을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무허가 건물과 판자촌, 그리고 공단 밀집 지역이 되었단다. 푸른수목원 자리는 논밭과 농업용수를 공급하던 항동저수지가 있었단다. 도시화로 논밭은 사라져갔고, 항동저수지는 환경 개념이 없던 시절 온갖 오폐수가 흘러들어 오염이 극심했단다.
모두 묻고 개발을 하느냐 아니면 어떤 용도가 적합하느냐 고민하던 서울시는 녹지 감소 해결이 필요해 공원 같은 수목원을 만들어 2013년 개장했단다. 그러니까 수목원은 식물 연구가 주목적인데 푸른수목원을 가보면 조금만 걸어도 힐링이 되는 잘 가꾼 공원으로 여겨진다. 수목원답게 크고 작은 모든 식물에 이름표가 달려 있어 식물 공부를 열심해 해야 할 것 같지만, 그런 건 건성건성 보고 이완된 몸과 마음으로 숲이 주는 이로움만 편하게 얻어 가면 될 듯한 곳이라는 것이다.
푸른수목원 정리를 위해 서울시에서 소개한 글을 보자.
“푸른수목원은 인적 없는 공터에서 친환경 청정수목원으로 개장한 서울시 최초의 시립수목원이며 2018년 서울시 1호 공립수목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식물 유전자원을 수집해 증식시키고 보존하고 있으며 항동저수지와 20개 주제정원에서 다양한 희귀식물을 볼 수 있습니다.
수목원은 우리 모두가 보호하고 가꾸어야 할 귀중한 자원이며 앞으로 자라날 어린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생명문화유산입니다. 푸른수목원은 오색정원, 야생화원, 어린이 정원 등의 주제정원과 안내센터, 숲교육센터 등 교육콘텐츠와 가드닝 프로그램 등을 통해 생태 학습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정말이다. 좀전에 본 풍경 말고 더 다양한 층들이 몰려 지나간다. 초중생들도 보이고, 이를 이끄는 숲해설가들도 보이고, 동창 모임 같은 어른들도 무리 지어 가는 게 보인다. 저수지 위를 거닐 수 있는 데크에 서면 보이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솟은 아파트들이 이곳에도 들어섰다면, 그건 인간이 만드는 인위적 공간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될 뻔했다. 오래전 뉴욕에 센트럴파크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만한 크기의 정신병원이 들어섰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었을 것 같다.
누군가는 앞마당에 품위 있는 정원을 가지고 넓은 자연 친화력으로 숨통이 트이며 원시와 연결된 삶을 살고 있지만, 누군가는 닫힌 베란다에 화분 몇 개 놓고 녹색지대라 칭하며 원시에 가까스로 접목한다. 또 누군가는 세간살이에 치여 삼시세끼에 목숨 걸며 탈출, 탈출만을 꿈꾼다.
이 명확한 구분이 계급성을 띠고 이념으로 대립하고도 남을 텐데, 어쩌면 그 여지를 무디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을 듯도 한 크고 작은 수많은 공원과 수목원들, 그 확대에 모두가 동의할까? 그래야 하는데, 그러면 참 좋은데, 지나온 세월 그러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누구나 왕족의 정원을 만끽하게 하는 느낌이 드는 공원이나 수목원, 그 아늑한 조성이 지친 이들에게 평화로움을 줄 것이다. 계급별 소득은 늘 차이가 나도, 계급별 불평등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해도, 아니 인간세상 그게 불가능해도, 근대에 들어 공공성을 띤 인위적인 숲이 마련된 곳에는 평등이라는 게 스며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느껴야 할까? <내면소통 명상수업>을 보면, “명상 상태에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고 현존이며, 존재의 본질적 상태다. 명상은 우리의 본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잠시라도 그냥 존재할(be) 수 있어야 무엇이든 제대로 할(do) 수 있게 된다.
24시간 내내 행위상태(doing mode)에 있고 단 한순간도 존재(being mode)하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에 탈이 날 수밖에 없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무엇을 해도 원하는 대로 나아지지 않는 고통이 온다 해도 그걸 멈추고 존재로 머물며 힐링할 수 있는 공원과 수목원을 다녀가면 몸도 마음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로 나아질 것이다. 세상 모든 생명은 다 거기서 거기, 즉 존재하는 동안 존재로만 살기 때문이다. 그 어떤 기준은 없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장승처럼 푸른수목원 모두를 감싸고 있는 듯한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다. 관리사무소 앞 너른 마당 한쪽에 거인 같은 키에 가지가 아래로 늘어져 있는 그 나무는 특이하게도 암수한그루다. 식물도감을 보면, 버드나무는 암수딴그루로 나오는데, 5월에 이곳 버드나무를 보면 반쪽은 은빛 솜털들이 씨를 머금고 있고, 반쪽은 가지와 잎만 보여주고 있다.
만일 나무들 세계에서 문자화된 언어가 있다면 이 나무는 심각한 왕따에 몰려 비정상 취급을 받으며 시련을 겪었을 듯하다. 하지만 떼거지로 다가가 폭력 언어를 가할 수 없는 부동의 나무들, 자기 자리에서 자기 존재로 최선을 다해 살 뿐이다.
<한국의 나무>를 보면 나무의 성 분류가 나오는데 양성화, 암수한그루, 수꽃양성화한그루, 암꽃양성화한그루, 암수딴그루, 수꽃양성화딴그루, 암꽃양성화딴그루, 암꽃수꽃양상화한그루, 암꽃수꽃양성화딴그루, 암꽃양성화-수꽃양성화딴그루가 있단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식물은 남의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살기 위해 각자의 모습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고 보면 될 듯하다.
휠체어 장애인들과 숲체험을 하고 돌아가는 길, 각기 자기 존재로 그 안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 같은데,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은데, 길은 멀고 먼 것 같다. 그래도 평화와 평등의 존재감을 높여주는 곳, 인간의 거주 공간에 알맞게 자리잡은 곳, 푸른수목원 같은 곳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행복감이 계속 쌓이겠지. 진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