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중랑천 관리사무실을 가야 한다. 숲해설 지평을 넓혀 보기 위해 시작한 사운드 스케이프 프로그램 참관을 위해서다. 산이 아니고 호수가 아니고 흐르는 하천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를 어떻게 나눌지 궁금하다.
처음 가는 길이라 네이버 지도 검색을 한다. 몇 번을 해도 한양대역 3번 출구에서 1.9km 걸어가라는 안내만 나온다. 한양대역에서 도보로 다시 검색을 한다. 가장 빠른 길이 26분 걸린단다. 중랑천을 따라 가다가 다리를 건너 또 하천을 따라 걷는 표시가 어지럽다. 잘 찾아갈 수 있을까? 난생처음 하천을 지표로 가는 길이기에.
사는 동안 한두 번 내렸던 것 같은 한양대역이 낯설다. 3번 출구로 나가 계단을 내려가는 데 길다. 직진해 하천으로 가는 계단은 가파르다. 도로가 나오고 뛰거나 걷거나 자전거가 다니는 길이 아래로 보이고 그 턱밑이 하천이다. 네이버 지도를 펴고 걷다가 해독이 어려워 곧바로 닫고 지형을 보며 생각해 본다. 청계천과 중랑천이 합해진다는 곳으로 일단 걷는다. 거기서 다시 보기로 하고.
소리로 풍경을 보는 날, 집중해 보려고 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들리지 않는다. 말소리, 뛰는 소리, 자전거 달리는 소리, 동부간선도로 차 소리, 성수역과 신설동역을 오가는 전철 소리만 들린다. 그 소리 사이를 헤집고 불어대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지만 살갗으로만 느낄 뿐이다.
어린 시절 하천 옆에서 들었던 꼴 베는 소리, 소 울음소리, 흙 밟는 소리, 물놀이 하는 소리, 썰매 타는 소리, 강물 불어나는 소리, 새 소리, 물고기 뛰는 소리, 풀벌레 소리, 풀들이 쓸리는 소리는 추억일 뿐이다. 하천이나 강은 들어가서 멱 감고 헤엄치며 소일하는 곳이 아니라 걷거나 달리는 풍경을 측면에서 빛내주는 배경일 뿐이다.
그곳에 어떤 생명들이 사는지 헤아리는 것보다 어디쯤 전망 좋은 맛집에서 미각을 만족시키는 행위가 살맛 부추기는 행복일 뿐이다. 세상 모든 게 우리 입맛대로 직조될 수 있다는 우월 가득한 지성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어떤 방향이든.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만 걷지는 않는다. 환경오염, 환경파괴, 기후위기로 인한 자연재해, 생물다양성 감소와 같은 환경문제가 눈에 밟힌 이들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다. 각종 오폐수로 악취가 나는 하천과 강을 깨끗하게 바꾼다. 거기에 다시 숱한 생명이 깃들도록 애쓴다.
그 노력 가운데 하나가 홀씨교육연구소가 추구해온 소리로 보는 풍경에 대한 인식 확산이다. 더럽혀진 자연을 눈으로만 확인하는 게 아니라 소리로도 확인하는 것이다. 자연의 소리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환경문제는 더욱더 심각해진다는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다.
그래서 (재)숲과나눔과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 열매가 ‘초록열매’ 3기 사업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홀씨교육연구소의 사운드 스케이프 교육을 지원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생태적 사고 지평 확대에 큰 기여를 하는 것이기에.
생소하고 이채롭지만 차츰 실마리를 얻어가는 소리 감각 훈련을 위해 살곶이다리에서 들려오는 듯한 이성계의 화살 소리보다 축구장에서 들려오는 공 소리보다 의식적으로 하천에 감각을 던지는데 원앙들이 보인다.
겨울철새 도래지이자 철새보호구역이라고 하지만 반팔 옷차림으로 10월 하순에 보는 겨울철새 원앙, 기후보다 먹을 게 있으니 왔을 거라는 생각을 품으며 잊었던 목적지를 다시 떠올리는데 갈리는 길들이 헷갈린다. 마침 그때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이 진행하는 ‘2024 중랑천 생물다양성 예술제’ 지표가 보인다. 그걸 따라 가니 중랑천 관리사무실이 나오고 행사에 참가하는 이들의 오손도손한 소리가 가을 햇살을 타고 하천으로 흘러드는 것 같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는 곳 일대에 원앙, 수달, 삵, 맹꽁이, 자라 등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만들겠다는 이들이 준비한 가을 축제 행사의 하나인 사운드 스케이프가 시작된다. 10여 명의 아이들이 통나무 의자에 앉아 강사의 말에 따라 중랑천을 바라본다. 병풍처럼 뒤에 서 있는 부모들도 시선을 하천에 둔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무슨 소리를 들었나. 아무리 귀를 열어도 차 소리만 들린다.
철교를 건너는 전철 소리만 들린다. 그래도 소리에 집중해 본다. 하천가에서 자라는 갈대 잎은 무슨 소리를 내는지 비벼도 본다. 발아래에서 뛰어가는 방아깨비가 혹 소리를 내는지 기대도 해본다. 멀리 오리들이 익숙한 소리를 내달라고 무언의 압박도 넣어본다. 그렇게 자연의 소리를 얻기 위해 애쓰고 또 애쓴다.
하천가를 떠나 도심에서 쓰고 버린 물들이 흘러나오는 중랑천 하수처리장을 지나며 고개 숙여 잉어를 보는데, 잉어가 무슨 소리를 내는지 아이들은 궁금해 한다. 진공 상태에 살지 않는 이상 물고기도 소리를 낼 텐데 대답이 난처하다.
멀리 원앙들을 쌍안경으로 살피다가 원앙은 또 어떤 소리를 내는지 궁금한데, 들어본 적이 없어 역시 난처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어려워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들은 자연의 소리를 오르골로 만들어보는 활동이 신날 뿐이다. 사람이 만든 제품에 사람이 만드는 창작 소리이지만 그 출발이 자연의 소리라는 걸 잊지 않는다.
소리를 듣는다는 것, 소리를 창작한다는 것, 그건 이전과 다른 감각 치환으로 그 끝에서 새로운 단어가 마음에 자리 잡게 된다. 짧은 연주에 ‘아기 새의 울음’이란 제목을 붙이는 것처럼. <김소월을 몰라도 현대시작법>을 보면, 감각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단어에 자신의 신체가 반응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소리 감각 훈련으로 소리를 표현하는 단어와 더 긴밀히 상호작용하게 되면 소리로 보는 풍경은 확대될 것이고, 그러면 자연의 소리가 줄어드는 게 어떤 문제를 불러일으키는지 감각적으로 더 깊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존 로크의 <인간지성론>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감각 인식을 철저히 바꾸는 것이다.
“인간을 다른 감각적 존재들보다 우위에 서게 하고, 인간에게 그가 다른 감각적 존재들에 대해 갖고 있는 우월성과 지배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지성이므로, 그리고 그 고귀함 때문에라도 확실히 지성은 탐구하려고 애쓸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다.”
그러니까 소리 감각 훈련은 여느 생명과 경계선을 갖는 지성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야성으로 돌아가 우리도 야생의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인식을 갖는 과정이다. 야생의 소리를 분류학적으로 알아채는 지식도 도움이 되겠지만 자연에는 정말로 다양한 소리들이 합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늘 깨어 있는 상태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선을 그으며 멀어지게 된 것은 우리의 일상이 편해지는 문명의 발전에 이끌려 갈수록 더 부지런히 학습을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생명체들을 절멸시키는 오염물질을 무심히 흘려보내기도 했지만, 이제 깨끗하게 처리된 오폐수를 내보내는 동굴 크기의 하수관도 만들 수 있고, 쓰레기더미 가득했던 중랑천에 버드나무와 꽃을 심고 가꿔 생명이 돌아오게끔 할 수도 있다.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것,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것, 어느 것이 인간의 진짜 모습인지 연구 대상이지만, 기후위기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게 인간 군상이 만들어내는 삶일지도 모른다.
한양대역에서 1.9km를 걸어간 중랑천 관리사무실 옆에서 시작된 사운드 스케이프 프로그램을 참관하면서 변화된 생각이 다시 돌아 나오는 길에 떠나지 않는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고’ 식으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지형에 덧씌워진 다리와 길들이 어지럽게 보여 마구 해댄 지청구를 슬그머니 내려놓는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보면, “시각은 분리하고 청각은 합체시킨다. 시각에서는 보는 사람이 보는 대상의 외측에 그리고 그 대상에서 떨어진 곳에 있음에 반해서, 소리는 듣는 사람의 내부로 쏠려 들어간다”라는 말이 있다. 즉 “우리가 듣는 것 속에, 즉 소리 속에 잠길 수는 있으나, 마찬가지 방법으로 시각 속에 잠길 수는 없다”는 것인데, 선으로 보는 중랑천이 아니라 소리로 듣는 중랑천이어서 그런지 세상 모든 게 다 하나의 자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망쳤다는 환경을 되살려 야생동물의 보금자리를 만들겠다는 생동 생추어리도, 야생동물의 소리가 중랑천 물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걷고 뛰고 달리는 소리와 공존하는 날도, 다 자연 속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자연의 삶이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자연 따로 도시 따로라는 시각적 분리가 소리에 집중해 걷다 보니 시나브로 합쳐진 중랑천, 사람도 살고 다른 생명들도 다시금 살아야겠다고 기지개를 펴는 중랑천, 그 역할이 사람에게 충분히 있다는 걸 알게 된 중랑천, 그래서 우리는 분투하는 것이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지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삶, 그 모순의 삶이 만드는 자연을 추운 겨울 다시 소리로 보기 위해 또 걸을 것이다. 걷다 보면 늘어난 생명의 소리가 왁자하겠지.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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