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8월 마지막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오후까지 도봉숲속마을에서 ‘2024 사운드스케이프 교육 전문가 양성과정’ 사업인 ‘열두 달 소리여행’ 가운데 ‘풀벌레 소리와 생태’, ‘음악교육과 소리산책’ 그리고 ‘소리교육 현장시연’ 프로그램을 들었다.
캐나다 작곡가 머레이 쉐이퍼가 정립한 사운드스케이프(soundscape)는 소리(sound)와 풍경(landscape) 합성어로 ‘소리 풍경’이라고 하는데, 자연 소리보다 인공 소리에 익숙한 이에게 오감에서 시각이 절대적인 이에게 이어폰 끼는 게 즐거운 이에게 소리로 풍경을 보는 인지 전환이 이뤄질까 싶었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이들은 늦은 밤 컴컴한 풀숲을 서성거렸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녹음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모여 소리 주인공을 가늠해 보고 계속해서 함께 걸으며 또 소리를 들었다. 전문가에 의하면 알락귀뚜라미, 왕귀뚜라미, 알락방울벌레, 극동귀뚜라미, 좀방울벌레, 풀종다리 등 귀뚜라미 6종과 줄베짱이, 날베짱이, 매부리 등 여치 3종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전혀 모르겠다.
어릴 적 마당 있는 집에서 분명 봤을 귀뚜라미가 녹색이 아니고 검은색이라는 게 난감했고, 소리의 주인공들 이름도 생소하게 다가왔다. 숲해설가 초기 그 세세한 식물 이름 앞에서 기진맥진했던 게 떠올라 몸도 마음도 버겁기만 했다. 언제 또 난해한 이름들을 구별해서 기억하나. 그러면서 한편으로 소리 풍경 대열에 있는 이들이 대단해 보였고, 그 선에서 이탈해 보지 않으려고 귀를 열어 보기로 했다. 인공 소리를 잘 맞추는 귀가 언제 자연 소리와 친해질지 모르지만.
다음 날 숲으로 들어가 자연 소리를 들으려고 기를 썼다. 새가 앉았다 떠날 때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나뭇잎 사이로 흐르는 바람 소리, 낙엽 더미 아래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들이 들려올까 청소 끝낸 귀에 온 신경을 모아 보았다. 아쉽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사람 소리, 차 소리, 이따금 멧비둘기 소리만 들릴 뿐 숨은 듯 드러나는 자연 소리는 귀에 감기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니 당연한 모습이라고 했다. 그 순간 오래 전 일이 떠올랐다.
이른 아침 나 홀로 북한산으로 간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길로 쑥 들어간다. 손으로 거미줄을 거두며 앞으로 나아간다.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안개 흐름조차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면의 소리 즉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다. 툭툭 흙 밟는 발소리도 날려 버리려고 애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의 경지에 이르려고 비우고 또 비워 본다. 내가 사라지도록 노력해 본다. 무(無)를 도모한다. 성공해 보기 위해 오랫동안 그 길만 간다. 길에서 나오면 늘 소리가 들린다. 겁이 덜컥 난다. 이 험한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잘 살아가지?
그때는 그게 좋은 삶을 이끄는 방법으로 알았다. 돌이켜 보니 그것보다 자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를 누가 왜 내는지 알아가는 공부를 했다면 그 길에서 나와도 두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소리 내는 모든 생명들의 존재 이유와 내가 다르지 않다고 이해해 가는 게 사람으로 폼 잡고 사는 것보다 나았을 것 같으니까.
사운드스케이프 초짜이기에 이틀 교육에서 풀벌레 소리보다 피피티 화면에 나온 한 문장이 눈앞에 계속 어른거린다.
“나는 귀뚜라미의 울음에서 지구의 맥박을 듣는다.”
열심히 읽어 보았던 <월든>의 작가 소로우가 한 말이란다. 그래서 검색을 해보니 <소로가 만난 월든의 동물들> 부제이다. 심장을 뛰게 하는 문장을 만나기 위해 책을 넘겨 가는데, 마지막까지 동일한 문장이 나오지 않는다. 엮은이가 쓴 서문에서 “귀뚜라미는 지구의 맥박이었다”를 보았을 뿐이다. 그 맥락을 느껴 보기 위해 소로우가 말한 귀뚜라미 이야기를 좇아가 본다.
“1852년 6월 17일 : 처음으로 무더운 밤들이 이어진 뒤 새벽에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는 지구의 꿈이 낮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나는 귀뚜라미들이 마치 아직 밤인 양 그렇게 이슬의 교리와 약속에 따라서 찌르르 우는 새벽녘을 무척 좋아한다. 아침의 순수함을 표현하면서 말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가 신선하고 이슬에 젖어 있는 시간이다.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에는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못하게 만드는 천상의 소리가 있다.”
새벽에 잘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깬다고 해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인공 소리를 듣는 시간,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천상의 소리라는 소로우의 감성은 그야말로 순수해 보인다.
“1851년 8월 20일 : 나는 더 작은 녀석들이 내가 모르는 소리를 내면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것을 본다. 그들의 다양한 소리를 구별해 보려 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그 소리들은 서로의 노래에 있는 틈새를 채운다. 사실 자신이 듣고 있는 소리로 귀뚜라미 종들을 구별하는 귀가 있다면 정말로 진귀한 귀일 것이다. 그 지구 노래의 공연장까지 추적하여 각 공연자가 어느 대목을 부르는지 알 수 있는 귀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게까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귀뚜라미가 여러 종이 있다는 걸 이제 처음 알았는데, 그 생김새 파악도 오래 걸릴 텐데 소리까지 구별한다는 것, 도전으로 그칠 확률이 높다.
“1857년 10월 18일 : 그렇게 녀석들은(검은왕귀뚜라미) 한 해가 저물 즈음에 따뜻한 목초지의 굴 입구에서 서서 겉날개를 서로 겹쳐 움직임으로써(수컷만) 이 날카롭지만 듣게 좋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럼으로써 계절이 오도록 돕는다.”
삐걱거리며 가을 전령사가 되고 멈춤으로 겨울 시작을 알리는 귀뚜라미라는데, 이제 우리 사는 곳은 에어컨이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 계절을 알리는 듯하다.
위 글에서 이어지는 글은 “따라서 인간의 산업과 활동이 내는 소리들-대포의 포성, 바위 폭파, 기차의 경적, 수레의 덜거덕, 장인의 망치질, 사람들의 목소리-은 멀리서 들으면 지구의 노래와 귀뚜라미의 삐걱거림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귀뚜라미들은 추위를 걱정하는 양 계속 굴 입구에 머물러 있다”이다.
<자연의 노래를 들어라>를 보면, 비생물적 자연의 소리를 지구음, 인간과 사육 동물을 제외한 생물의 소리를 생물음, 여기에 침입하고 가끔 섞여들기도 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인간음이라고 구별해 놓았는데, 소로우는 인공 소리를 지구의 노래라고 한다. 그걸 귀뚜라미와 같은 선에 놓는다. 소리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니까.
“1853년 11월 12일 : 눈으로 온통 하얗게 덮인 가운데, 둑 깊숙한 곳에서 희미하게 귀뚜라미가 노래하는 소리가 들린다. [연필로 추가: 개구리가 아니었을까?] 노래 주제는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활기와 신념으로 충만한 마지막 귀뚜라미는 최후의 인간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노래하고 있다...”
놀랍고 존경스러울 뿐이다. 연도는 다르지만 계절별 귀뚜라미 이야기가 뜨겁게 다가온다. 그러면서 1854년 4월 25일 일기에 나오는 “생명의 흐름이 증가함에 따라서 마치 지구의 맥박이 소리 내어 울리는 듯하다. 그 소리는 모든 자연을 좀 두근거리게 만들고 자연의 심장을 고동치게 한다”라는 문장 앞에서 숙연해진다. 소로우처럼 할 수는 없지만 지구의 맥박을 느끼기 위해 흉내라도 내보겠다고 다짐해 본다.
마침 다음날 산 아래 단독주택 방에서 풀벌레 소리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심신이 피곤해 나가기는 귀찮고 누워서 들어본다. 치르르, 치르르? 여치 같다. 쓰윽, 쓰윽? 베짱이 같다. 귀뚜르, 귀뚜르? 귀뚜라미 같다. 맞는지 틀린지 모르지만, 다른 세 가지 소리가 창밖에서 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장 마음이 평안해지는지 판단이 서지 않지만, 소리로 풍경을 상상하는 인지가 조금이라도 만들어진 것 같다. 더워도 다가오는 가을이라는 문턱에서!
[김서정 작가 소개]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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