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오래 서 있는 보라매공원 왜가리처럼 자연을 본다면

김서정 승인 2024.02.25 01:00 의견 0
서울 보라매공원 왕버들@김서정 작가


[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서울 보라매공원 연못과 정자 사이에는 고풍스러운 왕버들이 거꾸로 선 나무뿌리처럼 하늘로 더디게 뻗어 있었다.

탐조 전까지는 지하와 지상 그리고 천상을 잇는 생명체로 나무를 현실이자 상징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른 아침 눈에 잡히는 건 나뭇가지 사이 툭 불거진 까치집과 그 위에서 주위를 아우르는 시선을 보내는 까치들이다.

그러다 보니 왕버들이 풍겨 내는 아름다움은 무디어져 가고 곧장 연못 안 음악 분수대 시설물 모서리에 앉아 있는 왜가리로 몸이 살짝 비틀어진다. 이 동작이 나무에 대한 배신일지도 몰라 슬쩍 송구해지다가 한 쪽 다리로 서 있는 왜가리와 눈을 마주치니 움찔거린다.

고즈넉한 명상을 방해한 듯해 연못가 어린 나무 틈틈이 우루루 날아와 앉은 참새로 피했다가 다시 미동도 않는 왜가리로 옮겨간다. 왝왝 울어서 왜가리 으악으악 울어서 으악새라고도 한다는 왜가리 특징은 몸 전체가 하얀 백로와 달리 머리 꼭대기는 흰색, 눈 위에서 뒷머리까지 검은색 그리고 거기에 2~3개의 댕기깃이 있고, 영명은 Grey Heron으로 몸 전체가 회색빛을 띠고 있다. 몸길이 80~100cm, 날개폭 155~195cm, 몸무게 1.1~2kg 정도의 중대형 조류라고 하는데, 왜가리 자료를 보니 외롭게 세상을 유유자적하는 듯한 자태에 반하는 인간의 투영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여름철새인 왜가리를 겨울에도 볼 수 있는 건 한반도 겨울에 적응한 텃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움직임에 민감한 새가 왁자한 발걸음에도 꿈쩍 않는 건 인간 세상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킹가리로 불리며 하천 최상위 포식자로 불리게 된 건 천적이 없을 뿐더러 물고기, 새, 뱀, 쥐, 거북이 등 가릴 것 없이 꿀꺽꿀꺽 또는 꾸역꾸역 삼켜 버리기 때문이다. 홀로 있는 왜가리를 볼 때마다 곁에서 짝이 되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는데, ‘피도 눈물도 없는 왜가리 성장기’ 유튜브를 보고는 오히려 멀찍이 피해 가고 싶을 뿐이다.

왜가리@김서정 작가


내용은 이렇다. 어미 왜가리가 새끼들이 있는 둥지로 와 물고기를 토해낸다. 그런데 너무 커서 새끼들은 입에 넣을 수가 없다. 굶어야 한다. 몇 차례 반복된다. 그런 와중에 4마리 새끼들 가운데 한 마리가 공격을 당한다. 형제지간의 치열한 사투다.

결국 한 마리가 죽는다. 그 과정을 어미 왜가리는 지켜보고만 있다. 먹이가 부족하니 자식들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신호란다. 생물학적으로는 이해가 가도 인간적으로는 가늠이 안 간다.

서로 다른 종(種)끼리 같은 패턴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뭐 인간 세상도 충분히 벌어지는 일이라 여겨지니 생명체의 생존 방식은 다 거기서 거기 같다. 나무를 통해 새를 통해 자연을 알아간다는 건 무얼 의미할까? <종의 기원>을 보면, “자연 선택은 매우 짧고 느린 단계를 통해서만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이론을 통해 ‘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라는 격언-우리의 지식에 새로운 사실이 더해질수록 그 정확성에 더욱 확신이 가는 명제-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자연이 혁신에 대해서는 인색하지만 다양성에 대해서는 너그러운지를 명백히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자연을 몰랐을 때는 인간의 생각만이 기준이 되며 다양한 패턴의 삶이 부도덕하게 보였지만, 자연을 알아갈수록 자연이 만들어가는 이 거대한 시공간의 흐름을 도식화 한다는 게 불필요한 정의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것 같다.

숱한 존재들의 예측 불가능한 변화에 편승하며 살면 삶이 새 깃털처럼 가벼워질 거라고 위안을 삼으며 보라매공원을 내려다보고 있는 와우산으로 향한다. 지상으로 지나가는 2호선 전철을 흘끔 보고 돌아서 숲으로 들어가려는데, 느티나무 가지에 가지런히 앉은 비둘기들이 보인다. 자동으로 사진에 담는다.

비들기@김서정작가


근데 왜 그랬지? 그냥 예뻐서. 그랬겠지. 아니었다. 첫 탐조를 갔을 때 강사가 휘리릭 날아가는 작은 새들을 보며 되새라고 했다. 찰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보았던 핀치새 종류란다.

눈이 번쩍 뜨였다. 책으로만 보았던 그 유명한 새가 실제로 눈앞에서 지나갔다니. 그 뒤 참새보다 작지만 참새처럼 보이는 새들이 무리지어 나뭇가지를 휘젓고 날아갈 때마다 되새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잠시 쌍안경으로 보기는 했지만, 그 감격은 괜스레 오래갔다. 인류의 인식을 완전히 뒤바꾼 <종의 기원>을 있게 한 되새였기에. 궁금증을 참지 못해 <종의 기원>(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을 들고 찾아보기에서 되새류부터 확인해 보았다. 21~22쪽의 ‘옮긴이 서문’이다. “그렇다면 다윈은 어떻게 이런 혁명적 사상을 품게 되었을까? 물론 비글 호 항해를 빼놓고 그를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가 비글 호 항해 중에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되새류(finch)를 관찰하면서 자연 선택 메커니즘을 떠올렸다는 일화는 꽤 유명하다. 하지만 과학사 학자들에 따르면 미안하게도 진실은 다른 곳에 있다.

그는 갈라파고스 제도의 여러 섬에 분포에 있는 각종 새의 표본들을 만들기는 했으나 정작 어디서 어느 새를 채집했는지조차 기록하지 않았을 정도로 그 중요성을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실망이다. 오랫동안 핀치새 부리에 대한 이야기가 <종의 기원>에 있는 줄 알았다.

본문을 보면, “단면 공중제비비둘기의 부리는 되새류의 부리와 거의 유사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64쪽), “이는 마치 박물학자들이 자연계에 있는 되새류나 다른 조류들의 수많은 종들에 대해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 때에 느끼는 바와 같을 것이다”(73쪽),

와우산 직박구리@김서정 작


“예를 들어, 카나리아(canary-bird)는 다른 아홉 종의 되새류와 교배되었지만, 이 아홉 종들 중 갇힌 상태에서 자유롭게 번식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따라서 우리는 그 되새류와 카나리아 사이의 1세대 이종 교배에서나, 혹은 그 잡종들이 완벽한 생식 능력을 보일 수 있다고 기대할 근거가 없다”(358쪽)가 전부다.

하지만 책에 대한 예의가 있어야 하는 법, 오래전 꾸역꾸역 읽은 <종의 기원>을 다시 넘겨보았다. 정독은 머리만 지끈거리게 하기에. 그러다 비둘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세상을 바꾼 혁명적 사고의 출발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이는 비둘기에 대한 탐구로부터 이끌어낸 이유를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상식에서 상식을 뒤바꾸는 것으로 가는 유입, 그건 가장 탁월한 글쓰기 기법이었다. 자연을 본다는 게 무얼까?

감정이입과 투영을 통해 지혜를 얻는 것, 인간중심의 우월적 사고로 자연과 거리를 두어 자연을 자원으로 적극 해치우는 성장주의, “인간이 체계적인 선택과 무의식적인 선택의 방법을 통해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다면, 하물며 자연이 그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라는 찰스 다윈의 성찰에 다가가 보는 것, 정말 자연을 본다는 게 무얼까? 보라매공원 와우산에는 나뭇잎을 달고 겨울을 나는 참나무들이 전봇대보다 길게 자라 있었고, 꽃처럼 피어 있는 열매를 달고 겨울을 나는 백합나무들도 숲다운 운치를 주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 새들을 보려는데 보이지 않아 잠시 탐조 강사가 나누어 준 새 먹이를 산책로 기둥 손바닥만한 곳에 놓아둔다. 직박구리 한 마리가 날아와 먹이를 먹는 동안 바로 그 위에서 다른 직박구리가 내려다본다. 먹이 쟁탈전이라도 벌이려나 싶지만, 그건 그들만의 세상, 숲을 나와 다시 출발지 옆을 지나간다.

대략 두 시간이 흘렀을 것 같은데, 연못 안 시멘트 시설물 위에 앉은 왜가리는 본래 그곳 조형물이었다는 듯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미안하다. 왜가리 삶을 방해한 듯해서. 서둘러 비켜나 보라매공원을 더 보며 매를 보려고 한다.

순간 커다란 날개로 하늘을 휙 나는 새가 매 같기도 하다. 보라매공원에 왔으니 매를 봤다는 그 일상이 좋았을까? 좋기는 했는데, 자연을 보았는지 자연을 보는 사람을 보았는지 오리무중이다. 그 느낌을 그대로 안고 우리가 만든 자연을 보고 우리가 만든 경전철을 타고 그곳을 떠난다.

자연을 보기는 본 것인가. 답은 하나, 자꾸 보러 가야겠지. 거기에는 세상의 근원을 알 수 있을 듯한 모습들이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기에. 그걸 보는 눈을 길러야겠지. 오래오래 자연을 보는 왜가리처럼.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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