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온대 지방 겨울나무가 헐벗고 지내는 건 최소 에너지로 최대한 견뎌 유쾌하게 봄을 맞이하려는 생존 방식이다.
사람의 눈길을 육감적으로 확 잡아끄는 색감들이 퇴색한 것도 있고, 식욕을 돋울 만한 열매들이 일그러지거나 떨어진 것도 있고, 그늘로 위안을 주는 배려가 불가능한 탓도 있는지 관심 밖 겨울나무, 그들에 대한 애정을 멈추지 않는 생명들이 있다. 새들이다. 그들로 새 세상을 보는 걸 탐조라고 한다.
탐조가 겨울에 절정인 건 가벼워진 나무 사이에서 움직이거나 앉아 있는 새들이 잘 보여서다. 들판이나 개천 그리고 호수나 강에 가면 겨울을 나는 많은 철새들을 볼 수 있어서다.
즉 겨울에 눈을 사로잡을 풍경이라곤 하얀 설경뿐이라 단조롭고 외롭기만 할 텐데 역동적으로 춤사위를 벌이는 듯한 새를 눈에 담아보며 겨울을 보내는 게 물리적으로 가능하기에 겨울 탐조는 흥미로운 문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탐조를 삶의 영역으로 끌어당기기로 했다. 이는 독학이 불가능할 것 같아 전문강사가 진행하는 탐조 프로그램을 가보기로 했다. 나무마다 특색 있는 겨울눈 답사도 좋지만 새를 통해 새로운 인식을 가질 것 같아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얻어질지 절대 가늠은 안 되지만 일단 발을 담는 게 나은 삶일 것 같아서다.
강서습지생태공원 주차장 옆 탐조 집결지에 도착하니 오전 8시다. 영하에서 영상으로 기온이 올라가고 있지만 한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는 체감 온도는 낮기만 하다.
춥다. 장갑을 꺼내 끼고 귀마개를 하고 방화대교 아래로 향한다. 도시에서 강으로 흘러가는 경계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어디선가 온수가 식지 않고 밀려온 듯하다.
그 모습을 보니 물안개라는 단어가 주는 어슴푸레한 가운데 총기가 발동하는 감정은 피폐해지고 다리 기둥 사이사이 강물을 떠다니는 오리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저기 있는 새들 팔십 퍼센트는 흰죽지라고 보면 돼요.”
자연에 인공이 개입하는 풍경은 중동무이하고 맨눈으로 흰죽지를 보다 강사가 가지고 온 필드스코프로 흰죽지를 보다 다시 맨눈으로 흘러가는 강물에서 유유자적한 흰죽지를 눈에 담아 보려 애쓴다.
흰죽지라는 이름이 주는 생소한 낯설음을 극복하려고 인내해 보면서 말이다. 흰죽지 말고도 청둥오리, 고방오리들도 있다는데 제대로 흰죽지를 보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흰죽지는 죽지 부분이 흰색이라서 붙은 이름인데, 죽지는 새의 날개가 몸에 붙은 부분을 말한단다. <한국의 새>에 나오는 흰죽지 설명을 옮겨온다.
“흰죽지 Aythya ferina Common Pochard WV/c L 45cm. 대표적인 잠수성 오리. 수컷 : 머리는 적갈색, 가슴은 검은색, 몸은 회색이다. 부리는 검은색이며, 중앙에는 회색 띠가 있다.
변환깃은 색이 약간 흐려질 뿐 큰 변화는 없다. 암컷 : 머리와 가슴은 갈색, 몸은 회갈색이다. 눈을 지나는 황갈색의 둥근 뺨선이 있으며, 눈 주위는 흰색이다. 유사종 : 큰흰죽지, 미국흰죽지. 서식지 : 호수, 저수지, 하천, 하구.”
탐조 서너 번 한 이에게는 외계어 같다. 그래도 잠깐 보면 WV/c에서 WV는 겨울철새(Winter Visitor)이고, c는 흔함(common)이란다. 겨울 강물에 그 흔하디흔하다는 흰죽지가 참으로 버겁게 다가오고, 도감 설명을 익히는 게 난공불락일 것 같은 예감에 발이 시려온다. 그저 멍하니 강물은 제 갈 길 가고 오리들은 둥둥 떠다니고 그럴 뿐이다.
일단 하나 정도는 기억에 새겨 보려고 한다. 흰죽지는 물속에 잠수하여 먹이를 구하는 잠수성 오리이고, 청둥오리와 고방오리는 지상이나 얕은 수심에서 먹이를 먹는 수면성 오리라는 것 말이다.
즉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 흰죽지, 부리만 내렸다 올렸다 하면 청둥오리나 고방오리라고 여겨 본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정확한 동정은 아니겠지만 세세하게 관찰하는 행위는 난해하다. 그래서 숨이 막혀 오기도 한다.
나무 공부 초기 이 나무로 동정하면 저 나무라고 한다. 같은 계통의 나무이지만 모양에 따라 이름이 완전 다르게 되어 있어서다. 생존형 숲해설가라 열심히 머릿속에 넣어봤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고 또 새롭게 담아두면 또 잊혀지고, 그 과정이 난감했다.
그래서 탐조라도 해보자는 마음을 먹었다. 나무가 있는 풍경을 외면해서는 안 되는데 나무를 덜 보게 되니 새가 앉은 그 풍경에서 새도 보고 나무도 보는 일석이조의 겨우살이가 더 나은 삶을 만들어줄 것 같아서다.
그런데 역시 벽이 두껍다. 강물 위에 떠 있는 오리들 이름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랴, 이왕 나선 길 익히는 데까지 익혀봐야 하지 않을까.
이제 발길을 돌려 2002년에 개원을 한 강서습지생태공원 구석구석을 누비러 간다. 2017년 숲해설가 교육을 받으러 온 그때 늦가을보다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참느릅나무 열매도 풍성히 달려 있다.
새를 보기 위한 조망대도 만들어져 있고, 습지 위를 걸을 수 있도록 데크도 깔려 있다. 그 사이사이를 오가며 새들을 본다. 밭종다리, 박새, 되새, 청딱따구리, 딱새, 콩새, 흰꼬리수리 등을 본다고 보는데, 보는 건지 스치는 건지, 정말 그 새를 보는 건지 오리무중일 뿐이다.
그러다 한 분이 강사에게 무언가라고 전하고 곧바로 소리 내지 못하는 환호성이 얼굴 가득 번진다. 버드나무 가지에 앉은 네 마리의 새가 칡부엉이기 때문이란다. 고가의 필드스코프는 칡부엉이를 겨냥하고 참가자들은 줄을 선다. 탐조용 쌍안경보다 더 면밀히 칡부엉이를 보고 싶어서다.
먼저 나뭇가지에 나란히 앉아 있는 칡부엉이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잠을 자는 건지, 아니 야행성이니 지금 잠을 자는 거겠지, 라는 생각이 전달되어서인지, 움직이지 않는 그들이 고맙다. 탐조 예정 시간이 지나도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새들도 떠나지 않으니 내가 새를 보고 비록 주무시는 거겠지만 새가 나를 보는 시간이 평화로워 보인다. 나무로만 그 공간을 보던 풍경에 새 생명이 추가되면서 공간 이해도가 넓어지고 진득해진다. 자연을 구성하고 있는 숱한 생명들이 더 깊고 그윽하게 연결된다.
그러면서 생각에 다다른다. 왜 새를 보려고 했을까? 나무 이야기로 지구 열대화 현상을 나누기에는 한계가 보여서다. 나무를 많이 심자는 뻔한 결론이 이후 행동을 이끌어내서 못해서다.
그때 새가 눈에 들어왔다. 새가 점점 사라진다는 건 그 새가 깃들어 있는 생물의 종수 또한 급격히 사라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나무는 다시 심을 수 있다고 하지만, 새는 그렇게 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빛이 떠나간 듯한 갈색 평면에 칡부엉이 들어서 있다고 중천으로 향하는 햇살이 담뿍 내려앉는 것 같다. 그늘 천막 없이 잠자는 생명이 어릴 적 보았던 부리부리 박사 인형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해 상상과 현실이 끈끈하게 밀착되며 생명 에너지가 전해져 오는 것 같다. 이
래서 자연에 눈을 두고 살아야 하는구나. 그래야 모두가 소중한 걸 알고 그게 바로 생물다양성이라는 걸 느끼는 거구나.
하지만 산다는 게 참 옹색한 것, 배가 고파오면서 칡부엉이와 이별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온다. 그래서 얼룩덜룩한 보호색이 완벽하여 칡부엉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 영명이 Long-eared Owl로 귀깃이 토끼처럼 유난히 두드러진다는 것, 수리부엉이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 등등이 갈대숲을 지나는 바람처럼 스쳐가지만 추운 겨울 오전 내내 바깥활동은 쉽지 않은 것 같다.
혹 진정한 새 덕후가 되면 시간 따위는 잊을지 몰라도 초보자는 그곳을 떠나고 만다.
강서습지생태공원은 서울 강서구에 있다. 자동차로 갈 수도 있고, 한강 어디선가부터 걸어갈 수도 있고, 방화역에서 07번 마을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방화대교에서 행주대교까지 겨울나무 사이로 우연히 조우할 수 있는 새들, 새에 초점을 맞추면 더 많은 새를 볼 수 있는 탐조, 그 탐조가 숲을 햇살처럼 아름답게 해줄 것이다.
겨울바람에 일렁이는 강물이 꿈틀꿈틀 심장을 뜨겁게 할 것이다. 땅과 숲과 하늘을 날아야 하는 새들이!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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