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지리가 만든 풍경에 풍덩 빠지는 서울 송파구 탄천 양버들

김서정 승인 2023.03.21 14:22 | 최종 수정 2023.04.10 09:44 의견 0


[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은 한반도 지리를 대표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현재 살아가고 있는 생물들의 진화사를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산과 들 그리고 하천과 강은 인간이 지구에 등장하기 전 오랜 기간을 거쳐 지각변동과 화산활동의 결과로 갖게 된 모양인데, 그 사이 수많은 생명체들의 탄생과 멸종이 이어져 왔다.

그 과정을 다윈의 자연선택론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앎의 나무>처럼 자연표류로 바라보기도 한다. 즉 환경에 가장 알맞은 생명체가 무조건 적응과 생존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일단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 조건만 갖추면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를 “생물은 자기의 구성요소들을 스스로 생성하고 유지하는 자기생성적 자율적 체계다!”라는 문장으로 표현해 놓았는데, 이를 상상하기 위한 그림이 바로 산꼭대기에서 물을 쏟아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 물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세에서 특정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여러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갈 것이고, 경계에서 나누어지는 생명체들은 모습을 달리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구의 생물들이 다양한 것은 지리가 만든 결과이기도 하지만, 생명 스스로 노력을 해나갔다는 건데, 그 비유가 산꼭대기 물이라는 게 인상적이다.

그렇다면 20만 년 전 만들어졌다는 인간 종(種)은 무슨 노력을 해나가고 있을까?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인데, 인간은 그 자연을 인위적으로 바꾸고 있다. 그래서 모순을 느낄 수밖에 없다.”

<스토리텔링 진화론>에 나오는 글인데, 모순은 어떻게 느끼게 되었을까? 바로 언어 다. 즉 ‘모순’이란 단어를 발명해냈기 때문에 모순이란 개념을 갖게 된 건데, 그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데 필수 구성요소가 된다.

살기 위해 자연을 바꾸고, 살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살기 위해 모순을 알면서도 모순으로 살아가는 인간, 그게 자연에서 표류하는 우리의 방식일까? 그래서 걸어보았다. 50년 만에 개통했다는 송파구 탄천길을.

본래 자연이었을 탄천은 1970년대 제방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위험성 때문에 주민들의 접근을 제한했고, 2002년에는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역시 이용에 제약이 있었다.

그러다가 이미 조성된 성내천, 장지천, 한강을 잇는 순환형 산책로인 송파구둘레길을 완성하기 위해 지난 2021년 7.4km에 걸친 탄천길을 자연친화 산책로로 조성했다. 그래서 총 21km의 송파둘레길이 완성되었다.

8호선 문정역에서 탄천으로 향하는 데 공중 위 인공건물을 걷는 듯한 붕 뜬 기분이 드는 건 뭘까? 가뜩이나 탄천이라는 이름이 풍기는 이미지도 맑고 상쾌한 것 같지 않아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데, 법원이라는 정겹지 않은 건물을 지나쳐야 하니 괜히 길을 나섰나 후회가 든다.

하지만 모든 게 마음먹기 달린 것, 이른 봄 푸른 잎 하나 흩날리지 않는 황량한 탄천이 눈앞에 펼쳐졌지만, 탄천 안내판과 고향처럼 그윽한 딱 하나의 풍경에 정을 붙이며 그곳을 음미해나간다.

경기도 용인과 성남 그 어느 산꼭대기에서 시작되는 물들이 모이고 모여 흘러든 탄천은 성남시 옛 지명인 탄리(炭里)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이곳에 살았던 남이(南怡) 장군의 6세손인 남영(南永)의 호가 탄수(炭叟)라 탄수가 살던 골짜기라 하여 탄골 또는 숯골이라 불렀으며, 탄골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으로 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여기에 중국의 동방삭(東方朔)과 관련된 전설도 있다. 삼천갑자를 산 동방삭이 저승사자를 피하자 옥황상제가 탄천으로 저승사자를 보내 숯[炭]을 씻도록 하였다고 한다. 동방삭이 이를 보고 연유를 묻자 “검은 숯을 희게 하려고 씻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자 “내가 지금까지 삼천갑자를 살았건만, 당신같이 숯을 씻어 하얗게 만들려는 우둔한 자는 보지 못하였다”고 말했고, 저승사자는 동방삭을 붙잡아 옥황상제에게 데려갔다고 한다. 이로부터 숯내 또는 이를 한자로 표기한 탄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탄천이 숯을 씻어서 검게 변했을 리는 없을 테고, 오로지 공장하수와 생활하수를 무단으로 방류하면서 오염이 극심했고, 복구하면서 이제 자연친화라는 느낌을 가지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인류세를 만든 인간의 위력이 참 대단해 보인다. 자연을 망치기도 하고 자연을 자연답게 만들기도 하는 인간의 행위, 가히 생물의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어릴 적 신작로에서 보았던 듯한 풍경이 반가우면서도 약간 어질하다. 갓 심어놓은 양버들 때문이다. 얼핏 보면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 있네’에 나오는 미루나무 같다. ‘양버들’이라는 푯말을 보지 않으면, 미루나무 동요를 아는 세대는 미루나무 멋있네 하며 걸어갈 것이다.

하지만 미루나무와 양버들은 같은 버드나무과이지만 생장과 생김새가 조금 다르니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 이 모든 게 다 지리가 만들고 그 지리에서 자기생성을 해나가면서 만들어진 모양이지만, 그 갈래를 인지해 분류를 하는 인간들, 그게 인간의 자기생성이라는 걸까?

양버들과 미루나무, 어디서든 빠르게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가로수로 심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들여온 수입 나무라고 하는데, 양버들은 유럽의 버드나무, 미루나무는 미국의 버드나무라고 한다. 미루나무는 버드나무와 다른 생김새를 가졌을 거라 생각해낼 수 있는데, 양버들은 이름에 버들이 있으니 늘 헷갈린다. 좀더 들어가 버드나무에는 물을 좋아한다는 의미의 Salix 속명이 붙고, 양버들에는 민중을 뜻하는 Populus 속명이 붙는다.

이걸 알면 완전 다른 나무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Populs속 나무들에는 사시나무가 있고, 흔히 포푸라라고 불리는 이태로포푸라도 있기 때문이다. 즉 Salix와 Populus가 붙은 나무들의 잎 모양을 보면 전자는 길쭉하고 후자는 달걀형의 삼각형이기 때문이다.

포푸라 혹은 포플러로 불리는 나무는 참나무처럼 비슷한 나무를 통칭 묶어서 부르는 이름인데 양버들을 먼저 수입한 일본에서 이 나무 이름을 ‘セイヨウハコヤナギ(西洋箱柳)'이라고 지었고, 여기서 서양의 버드나무, 양버들, 이렇게 불렀다는 유력하다고 한다.

신작로라 불리던 길이 있던 시절의 대표 가로수 미루나무가 혹 양버들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니 이태리포푸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가로수도 시대 흐름에 따라 바뀌어서 그런지 이제는 미루나무든, 양버들이든, 이태리포푸라이든 거리에서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추억 하나가 싹둑 잘라져 나간 듯한 공허감이 있는데, 그 운치를 살리기 위해 한강에 양버들을 대거 심어나가고 있다.

‘나무도감 공부’ 유튜브를 보면, 양버들은 중심줄기에서 가지가 항상 위로 뻗어나가기 때문에 빗자루 모양을 하고 있고, 이태리포푸라는 양 옆으로 퍼져 우람한 모양을 하고 있고, 미루나무는 아래는 양버들, 위는 이태리포푸라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만 기억하면 구분이 갈 수 있는데, 그래도 더 면밀하게 동정하고 싶으면, 잎 모양을 확인하면 된다. 양버들은 마름모형이고, 미루나무는 둥글고, 이태리포푸라는 폭보다 길이가 긴데, 사실 이것도 현장에서는 잊기 쉽다. 즉 대단한 관심을 갖지 않고서는 바로 기억해 제대로 된 동정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도 양버들이라는 푯말이 있으니 양버들이라 생각하며 탄천을 걷는다. 그러면서 <앎의 나무>에 나오는 “진화란 오히려 방랑하는 한 예술가와 비슷하다”라는 문장을 떠올린다. 그는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여기저기에서 실 한 가닥, 깡통 한 개, 나무 한 토막을 주어 그것들의 구조와 주위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그것들을 합치는데, 거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단다. 이유가 없다는 건 계획이 없다는 것이고, 이게 바로 자연 표류라는 것이고, 거기서 새로운 모습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우리는 이름을 붙여댄다. 그래서 미루나무가 양버들이 되는 순간 먼지 풀풀 나는 신작로에서 버스 꽁무니를 따라 마구 뛰어갔던 어린 나도, 가다가 넘어져 보자기 책가방이 개울로 훌쩍 비상했던 아픔도, 나무 아래 앉아 시장에 감 팔러 갔던 엄마가 언제 오나 조바심을 태우던 동동거림도 모두 빗물에 쓸려 하천으로 강으로 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슬퍼하지 마라. 그때 몰랐던 게 있었다. 양버들은 잎이 나기 전 봄, 누에 같기도 하고 송충이 같기도 한 길쭉한 꽃들이 피어난다는 걸. 그 중 한 나무는 암나무이고, 한 나무는 수나무라는 걸. 그걸 지칭하는 것 또한 언어이지만, 그 언어를 지우며, 지리가 만든 풍경에 풍덩 빠지면, 삶의 소리들이 다시 되살아난다는 걸. 탄천 바람이 그 느낌을 더 그윽하게 해준다는 걸. 맑고 푸른 탄천이.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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