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우의 국제논단] 정치인과 욕설의 역학관계

최진우 승인 2023.01.19 16:41 의견 0
저신다 아더 전 뉴질랜드 총리=JTBC뉴스 유튜브 공개영상 캡쳐


[뉴스임팩트=최진우 전문위원] 뉴질랜드 최연소 총리 기록을 세운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가 5년3개월간의 재임을 끝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아던 총리는 최근 뉴질랜드 북섬 항구도시 네이피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깜작 사임을 발표해 언론과 국민을 놀라게 했다.

아던 총리를 둘러싼 일화는 많다. 2017년 야당인 노동당 대표에 올라 그해 10월 치러진 총선에서 노동당은 46석을 얻었다. 여당인 국민당(56석)에 10석이나 밀렸지만 다른 정당을 끌어들여 연정을 이끌어낸 공로로 그는 총리에 올랐다.

아던은 2018년 6월 파트너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고 6주간 출산휴가를 다녀왔고, 모유 수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3개월 된 딸을 데리고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등 재임기간 중 숱한 화제를 뿌렸다.

2019년 이슬람 사원테러사건이 발생하자 히잡을 쓰고 현장을 방문해 피해자 유족을 위로하는 사진은 세계에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고 코로나19 기간 국경을 아예 봉쇄하고 국내 이동을 제한하는 강력한 방역정책으로 뉴질랜드를 팬데믹에서 구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덕분에 아던은 2018년 타임이 선정한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하늘 높은줄 모르게 치솟았던 그의 인기는 그러나 팬데믹 기간이 길어지고 전세계를 덮친 인플레이션 충격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더 이상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다고 보고 사임을 발표한 것이다.

그의 중도퇴진에는 욕설 논란도 한 몫을 했다. 그는 작년말 국회에서 마이크가 켜진 줄 모르고 야당 대표를 향해 거만한 멍청이(an arrogant prick)라고 혼잣말을 한 것이 그대로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와 구설에 올랐다. “강해집시다, 친절합시다”로 평소 친절을 강조했던 그의 정치적 슬로건과 배치되는 이 행위를 계기로 속이 다른 정치인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사실 욕설로 곤욕을 치른 정치인은 한 둘이 아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당시 시도 때도없이 반복해서 등을 쓰다듬자 혼잣말로 “개xx”(SOB)라는 욕설을 내뱉어 한국측 대표단을 곤혹스럽게 했다.

한국에서는 정치인들이 우정을 과시하기 위해 서로 손을 잡고 회담장으로 이동하거나 나이든 정치인이 나이 어린 정치인의 등을 쓰다듬는 행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만, 동성 간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은 클린턴 입장에서는 화가 날 법한 일로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인다.평소 입이 거칠기로 유명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욕설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는 상대후보인 힐러리 클린턴과의 3차 TV토론에서 “못된 여자”라는 욕설을 내뱉는 장면이 전세계로 생중계되기도 했다. 그는 재임기간 뿐 아니라 퇴임후에도 욕을 입에 달고 살고 있다. 작년 9월에는 미국 조지아주 소도시 페리에서 열린 집회에서 지지자들에게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는 주장과 함께 “바이든이 멍청한 x자식임을 보여줬다”며 원색적인 욕설을 퍼부어 구설에 올랐다.

조폭 수준의 거친 언행으로 유명세를 탔던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범죄에 연루된 경찰관들을 불러 모아 욕설과 함께 살해 위협까지 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일화다.그는 각종 범죄에 연루된 경찰관 100명을 대통령궁 앞마당에 불러놓고 “개xx들” “죽여버리겠다”는 등의 험한 말들을 내뱉어 과격하고 불같은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조 바이든이 주최한 행사에 참석하고 나오는 길에 박진 외교부장관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욕설을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청와대는 즉각 욕설을 했다는 의혹을 부인했고 외교부는 이를 보도한 MBC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정치인과 욕설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관계로 보인다. 정치인도 사람인지라,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공개석상에서 했다면 문제가 커지는 것이고, 혼잣말로 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들었다면 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정치인도 감정이 있는 사람인 것을 감안한다면 욕설 자체는 나쁘지만, 전후맥락을 고려해 그 행위에 대해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앞서 예로 들었던 아던 총리는 야당 대표를 겨냥해 내뱉은 욕설이 국회 녹취록에 그대로 실렸는데, 이 사본이 뉴질랜드 전립선암 재단을 위한 온라인 자선 경매에서 8000만원에 팔렸다고 한다. 욕설 녹취록이 자선경매에 나왔다는 것도 기이하지만, 그것을 8000만원이란 거액을 들여 사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신선해 보인다.

문제의 욕설이 담긴 녹취록은 자선경매에 나가기 전 아던 총리와 야당대표가 각각 서명을 해서 또 다른 화제를 일으켰다. 두 사람 모두 욕설로 인해 어색해질 수 있었지만 욕설논란뒤 아던이 곧바로 사과하고, 야당대표는 이를 쿨하게 받아들여 일단락됐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선경매에 녹취록이 나간다는 소식에 서명까지 해주는 친절함을 보여준 것이다.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상생할 때는 상생하는 정치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 같아 기분이 유쾌하다.

뉴스임팩트 최진우 wltrbriant65202@gmail.com

저작권자 ⓒ 뉴스임팩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