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울의 독일편지, 머나먼 땅, 또 다른 시간(2편)

Der erste Brief 첫 편지

김서울 승인 2022.04.01 10:33 | 최종 수정 2022.04.01 16:49 의견 0
뮌헨 시내 = 김서울


[뉴스임팩트=박시연 칼럼니스트]또 ‘괜찮은 것’ 으로 느꼈던 이곳의 모습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사람들의 모양새가 정말 다양하다는 것이다. 삭발을 하든, 반만 깎아 형광 색으로 염색을 하든, 한참 쌀쌀한데 반팔을 입든 간에 누구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이 독일 내에서는 나름 대도시라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인종의 구성도 한국에 비하면 정말 다양해 보였다. 동양인은 그 중에서도 드물어, 내가 지나가면 한 두 사람씩 흘깃흘깃 쳐다보기는 했지만.

둘째는 반려동물들에 대한 것이다. 독일에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이 정말 많고, 동물을 책임지고 돌보는 일과 관련해 의식 수준도 높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 이곳의 개들은 사람 같다. 목줄 없이 자유로이 뛰어다니고, 대중교통이며 마트와 같은 공공시설에서도 보호자와 함께 나란히 걷는다. 어릴 적부터 잘 교육받아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부 순하고 의젓하다. 다른 이들에게 함부로 굴거나 짖어대는 건 보지 못했다. 특히 한국의 대도시들과는 달리, 아무리 대도시여도 늘 녹지가 있고 고층 빌딩은 드문 이곳 뮌헨, 나아가 독일의 환경은 반려동물과 함께 살아가기에 적합해 보였다.

그들을 볼 때 마다 한국의 비좁은 아파트나 빌라, 특히 비정상적으로 과열된 수도 서울에서 답답해하고 사람들 발에 채이곤 하는 반려동물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한 국가의 선진된 정도를 알고 싶으면 그곳에서 약자들이 어떻게 대우받는지를 보라는 말이 있다.

말 못하는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잔혹 무도한 행위와 그것을 가만 내버려두는 한국 사회의 ‘규칙’ 들은, 선진국 반열을 넘보고 있는 국가로 거듭난 지금도 바뀌지 않고 있다. 일어나지 않아도 좋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멈출 수 있는 고통 인지라 더욱 막막하다. 하여 행복하다는 듯 뛰노는 그들을 보고 있을 때 나는 가끔 착잡해졌다.

뮌헨 시내 신호등=김서울


마지막으로는, 언어적 특징에 관한 것이다. 대부분이 알고 있겠지만 독일어에는 한국어에서와 같은 높임 표현이 없다. du와 Sie의 구분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는 한국어에서와 같이,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는지’ 의 표지라기보다는, 너와 나 사이에 서로의 보호를 위한 일종의 경계를 마련하는 수단에 가깝다. 나이가 달라도 같은 학생이면 대부분 du를 쓰고, 선생과 학생 사이에선 양쪽 모두 서로에게 Sie를 쓴다.

먼저 언급한 학생이나 동갑내기 사이 등 특정 상황들에서는 통하지 않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는 대부분 Sie를 쓴다. 그러나 만약, 대학 교수와 학생이라고 할지라도 사석에서 만날 정도로 친해지고 같이 술 한잔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면 서로 du를 쓰기도 한다. 즉

, 독일어에서 du와 Sie는 그저 친밀함의 정도에서 차이가 나는 호칭들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호칭-지위는 대부분 나이로 결정되기 때문에, 단지 나이가 더 어리다는 이유로 나는 존대를, 상대 쪽에선 하대를 하는 언어 문화가 일전부터 내내 거슬리고 때로는 불쾌하기까지 해왔던 터이다, 그런 내게 독일어의 이런 점은 무척 마음에 든다.

이런 세 가지 특징들,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는 것과 동물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것, 그리고 언어라는 하나의 문화 현상에서 보여지는 한국과 독일간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 다음의 글에서 더욱 세심히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코너의 주제가 주제이니 만큼, 먼저 예시로 든 세 가지 주제 말고도 할 이야기는 많을 것이다.

당연하겠지만 이곳에 와서 나날이 즐겁고 마음에 드는 일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장점을 많이 보았지만, 앞으로 계속 이곳에서 살아가고 독일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잘 알고자 한다면, 마음에 들지 않고 이해 가지 않는 부분들은 자연히 생겨날 것이다.

뮌헨 시가지의 아파트=김서울


지금 당장만 해도, 아직 성인으로 불리기에도 어색한 나이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나라와 도시에 홀로 적응해가는 일은 힘겹다. 언뜻 ‘유럽의 대학들은 입학이 쉽고 졸업이 어렵다 ’는 말로 오해 되기 쉽지만, 결코 쉽지 않은 입학 준비 과정-특히 독일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에게는 더더욱-과 그로 인한 바쁘디 바쁜 일상은 나를 지치게 한다. 한국에서와는 달리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능란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요인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이 글의 초입에 서술했던 바 여전하다. 내가 선택한 모험을 나는 있는 힘껏 즐기고 또 배겨내려고 한다. 그에 따른 어려움들은, 가끔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지겠지만, 내게 달가운 것이다. 아마 독일의 철학자라고 하면 제일 먼저 거론될 사람들 중 하나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일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Was mich nicht umbringt, macht mich stärker.)”. 그저 멋들어진 결의로만 생각될 수 있는 문장이지만, 들여다보면 묘하다.

밥 먹는 일도, 잠을 자는 일도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나는 강해질 수 있다. 살아서 죽어가는 한 나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내 삶이 왜 이런 모양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나의 삶이 어떻게 되기 바라는지를 잘 알고 있다. 내 삶에 대한 나의 숙고, 받아들임, 그리고 책임감 있는 결단을 통해 나는 지금 여기에 나 자신으로서 살아있다. 그러니 아마도 괜찮을 것이다. 내가 괜찮게 만들 것이니까.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저작권자 ⓒ 뉴스임팩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