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오펜하이머. @뉴스임팩트 자료사진
[뉴스임팩트=최진우 전문기자]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 순간, 프로젝트를 이끌었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다."
◇원자폭탄의 아버지, 그리고 죄책감=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를 이끌며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1945년 8월 9일)에 잇달아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그는 깊은 도덕적 고민에 빠졌다. 수십만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피폭 후유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폭탄 투하 이후 해리 트루먼 대통령을 만났을 때, 오펜하이머는 "우리의 손에는 피가 묻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며 그를 "질질 짜는 물리학자"라고 조롱했다. 이 사건은 오펜하이머가 미국사회에서 배척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핵무기 경쟁을 경고하다=1945년 10월, 오펜하이머는 핵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과 함께 국제적인 핵 통제를 주장하는 ‘과학자 선언문’을 지지했다. 그는 원자폭탄이 단순한 전쟁 무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무기임을 깨닫고, 핵무기 경쟁이 세계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미국 내에서는 더 강력한 무기인 수소폭탄(H-Bomb) 개발이 추진되었다. 에드워드 텔러 등은 수소폭탄 개발을 주장했지만, 오펜하이머는 이에 반대했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보다 수백 배 더 강력했으며, 이는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탄압과 미국 사회에서의 배제=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 정부와 군부는 소련보다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수소폭탄 개발을 강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이에 반대하며 국제적 핵무기 통제를 주장했고, 미국에서는 그를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AEC)는 오펜하이머를 상대로 청문회를 열고, 그가 반미적 행동을 했으며 공산주의와 연관이 있다는 혐의를 제기했다. 결국 그는 보안 인가(Security Clearance)를 박탈당하며 모든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 학문적 자유와 정치적 압박이 충돌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오펜하이머의 명예 회복=공직에서 밀려난 후에도 오펜하이머는 학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그는 과학자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며 핵무기 통제와 군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의 경고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었고, 미국 내에서도 그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오펜하이머에게 엔리코 페르미 상(Enrico Fermi Award)을 수여하며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 하지만 케네디 대통령은 시상식 전에 암살당했고, 후임자인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이를 집행하면서 오펜하이머의 공로를 다시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삶은 과학자의 역할과 윤리적 책임, 그리고 몰아가기 식의 정치적 탄압 속에서 진실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