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울 칼럼니스트]필자는 현재 철학을 공부하고자 독일 뮌헨에 있다. 하고자 하는 일, 바라는 세상을 찾고 이루어 나가고자 외국에서의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많은 줄로 안다. 독일에서의 공부, 생활, 그리고 느껴진 것들을 잔잔히 들려주는 이 코너를 통해 나는 나와 같은 처지인 이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를, 그렇지 않거나 못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잠깐의 환기를 제공하고자 한다.[편집자주]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세계가 대지에서 밀려나옴을, 또한 대지로 축적되어감을 이야기했다. 다른 땅, 다른 환경, 다른 문화와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사람의 세계’ 인 이곳에서, 나는 새롭고도 익숙한 말들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언어라는 복잡한 사회 현상이 단 한가지 이론으로 설명되는 것은 오히려 이상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분명히 유교 사상과 농경 사회의 오랜 지속으로 서양에 비해 훨씬 강한 집단주의, 권위주의가 큰 원인인 것 같기는 하다.
‘나’ 대신 ‘우리’, 또는 ‘사람’ 을 자주 주체로 내세우는 것, 압존법이니 주체-객체-상대 3개로 나뉘어진 높임법, 그 안에서도 수많은 특수 어휘, 어미 변화 규칙, 특히 거진 일곱이나 되는 상대 높임법의 종류라든지 하는 경어법에서의 복잡성도 아마 그런 까닭으로 굳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대화 참여자들을 상황에 따라 몹시 섬세하게 높이고 또 낮추는 말들이 필요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말들이 하나의 규칙으로 굳어질 만큼 자주 사용되었다는 것은, 한국에서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사회적 지위‘란 애초에, 오직 그 지위가 유효한 집단 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한 집단의 약속인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를 분간하는 게 중요했다는 것은, 집단에 대한 순응이 중요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 누가 ‘우리‘이고 누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이 그리도 중요했다면 ‘우리‘가 자주 ‘나‘ 대신에 주체를 이르는 단어로 사용되는 까닭도 아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지위나 계급이 중요한 사회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많은 부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의해 대표된다.
물론 나는 국어학도 독어학도 전공한 적이 없고, 일반적인 언어학 또는 사회 언어학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와서 한국어 구사의 기회가 적어진 후 이다. 한국어를 쓸 기회가 드물게 되자, ‘한국어‘라는 하나의 ‘대상‘ 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어도 하나의 언어‘라는 것을 나는 이제 더 잘 느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다. 그러나 내게 한국어는 모국어이고, 때문에 나는 여태까지 그것을 하나의 언어라기보단 곧 나의 생각이고, 말인 것처럼 느꼈다. 한국어로 무엇을 이야기 할 때, 나는 ‘내가 지금 말을 한다’ 고 느꼈지, ‘내가 지금 한국어를 사용해 말을 한다’ 고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직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은 생각들에 대해서도 그렇다. 한국인은 한국어로 생각한다. 허나 그 어떤 한국인도 ‘나는 지금 한국어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고, 다만 ‘나는 지금 생각한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온 뒤로 나는 한국어를 구사할 때 아주 약간의 거리감을 느낀다. 아직 한 달 밖에 지나지 않았고, 당연히 한국어가 독일어보다 훨씬 가깝고 자연스럽게 느껴지지만 분명 무엇인가가 달라졌다.
익숙함이 가리고 있는 세상의 본 모습은 생각보다도 많다. 어른이 되기 몇 년 전, 이 사실을 퍼뜩 깨닫고부터 나는 가끔 난생 처음 하는 것처럼 일상을 살아보았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이게 무얼까, 생각하기도 하고, ‘사람들 지나가는 거리‘ 를 보는 것이 아니라 ‘신기한 습성을 가진 지구의 동물 종’ 을 관찰하기도 했다.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뿐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라. 단지 일상의 작은 순간들 뿐 아니다. 언어, 구성원들 대부분에게 지지되는 사회적 관습(일반/대학 교육, 노동, 결혼, 출산…)들도 그런 시선에서 바라보면 몹시 낯설다. 그 어디에도 당연지사가 없다.
평소에도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려고 시도해왔던 나이지만, 독일에 온 뒤로 한국어에 대해 느낀 거리감은 새롭다. 다른 언어권에 살아보지 않는 이상 모국어와 멀리 떨어지는 경험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유독 한국인을 찾아보기 힘든 독일 뮌헨으로 유학 온 덕에 나는 내 모국어에 대해, 나아가 나의 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끝으로 나는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지금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내가 ‘부모‘, ‘선생‘ 등의 이름을 붙인 그들은 사실 무엇인가?‘, ‘말과 세상은 과연 어떤 관계 속에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보라. 그리고, 자주 두렵게 느껴지는, 전에 알던 것과 다른 세상의 모습들, ‘차이‘ 를 투명한 눈길로 응시해보자. ‘
투명한 시선으로 응시해보자는 말인즉슨, 섣부르게 판단해 그것들의 진면모를 놓치지 말자는 이야기다. ‘원래 그랬어.‘, ‘사람들이 괜히 이렇게 해 왔겠어.‘ 따위의 간편한 말들로 눈 앞을 가리는 일, 지금껏 살아온 세계에 그저 머무는 일은 수월하다. 무언가 새로이 알고자 하는 일이야말로 고되고도 힘겹다.
내가 글을 이런 제안으로 마무리 짓는 것은 그런 까닭에서다. 또, 당연스럽게도 내가 제안한 것들은 굳이 외국으로 떠나지 않더라도 생각해볼 수 있고, 충분히 시도해 볼 수도 있는 것들이다. 새로운 앎은 전에 알던 것들과 기꺼이 낯 가릴 때서야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당신은 정말 ‘너 자신을 알고‘ 있는가? 오늘도 묻는다.
*이 기사는 호서대학교 혁신융합학부 교수 문윤덕의 ‚독일어 커뮤니케이션에서의 공손 전략: 친근감 여부에 따른 공손을 중심으로(Politeness Strategy in German Communication: Focusing on Politeness according to Familiarity)‘ (2020) 및 서강대학교 철학과 조교수 김준걸의 ‚‘내‘의 공손한 표현으로서의 ‘우리‘*‘ (2020) (본문 내 표기(1))를 참고해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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