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한유엔기념공원@김서정 작가


[뉴스임팩트=김서정작가]하루 부산 답사 목적지는 재한유엔기념공원이었다. 저녁 출발 전까지 시간이 나면 이기대공원을 걷기로 했다. 두 곳 방문만으로도 기대감이 가득했는데 그 사이 대연수목원을 만난 건 놀라움이었다. 그래서 떠남은 두서없이 이루어진 관계 속에서 괜찮은 인연을 깊이 사색하게 하는 삶의 필수과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행신역에서 KTX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하니 갓 10시가 넘는다. 비 소식이 있어 바깥으로 빠르게 나가려고 하는데, 트렁크 가방을 밀고 다니는 외국인들이 많아 진도가 더디기만 한다. 잠시 호흡을 고르고 빈틈을 찾는데 공항에 온 것 같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사람들이 골고루 눈에 띈다. 한국 사람은 그림자로 밀리고 정말 외국 사람들 천지인 듯하다. 3년 전 부산에 왔을 때도 그랬나 더듬어봐도 분명 달라진 풍경에 기시감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오래전 사라진 부산역 광장을 채운 계단을 내려와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빗방울이 가늘게 소리를 낸다. 마침 미리 검색한 41번 버스가 와 우산 펴지 않고 바로 올라탄다. 빈자리를 찾으며 사람을 보는데 한국 사람 반, 외국 사람 반 비율로 보인다. 멈칫거리는 사이 육중한 덩치의 외국인이 미는 느낌이 들어 얼른 자리에 앉는다. 그는 10킬로짜리 쌀 포대 같은 배낭을 메고 뒤에 자리를 잡는다. 부산에 오면 지하철로만 이동을 했는데, 오랜만에 보는 기다란 산자락 건물들이 부산이라는 걸 실감나게 만든다.

부산 지명 유래를 보면, 조선시대에 ‘부산(富山)/부산(釜山)’으로 불리웠는데는 산 이름이 아니라 부산포와 관련된 명칭이라고 하고, 부산포에 내리면 보이는 산이 가마솥(釜) 모양이라고 하고, 그 산이 어느 산인지 여전히 사료 발굴 중이라고 하는데, 분명한 건 부산은 바다와 산으로 이루어진 지역이고, 그래서 평지가 적어 많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지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부산이 갑자기 커진 건 한국전쟁 시기였다고 한다. 전쟁 전 47만여 명이었던 인구가 1951년에 84만여 명으로 대폭 증가하였고, 이후 무계획 속에서 산허리를 깎아 촘촘히 들어선 주택들이 계획을 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거주지로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는 내용에 삶이라는 키워드를 넣어 비탈들을 올려다보는데, 누군가 유튜브를 소리 내어 듣고 있다. 분명 한국말은 아니다. 정말 부산은 국제도시인가 하며 눈에 힘을 빼자 운전기사 쪽에서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온다. ‘Country roads, take me home(시골길이여, 나를 고향으로 데려가 줘요)’에 이어 나온 ‘Donde voy, donde voy(어디로 갈까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를 듣다 보니 여기가 한국인지 외국인지 헷갈린다.

혹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묻힌 외국 전사자들을 머릿속에 넣고 떠나 그런 것만 흡수되나 착각이 일어날 무렵 1차 목적지인 대연역이다. 얼른 내리는데, 배낭을 멘 외국인이 뒤따라 내린다. 그가 재한유엔기념공원으로 향하나 눈길을 주는데 사전에 검색한 방향과 다른 곳으로 간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을까 하다 네이버 지도를 펴고 길을 따라가 본다. 느낌이 아주 다른 곳으로 가는 것 같다. 실패다. 그래서 억양 센 부산 어르신의 친절한 설명을 되뇌고 되뇌며 인도와 차도 구분 없는 도로를 걷는데, 역시 한국 사람 반 외국 사람 반이다. 이제 착시가 아니라 팩트다. 기차역은 그렇다 해도 버스 안과 한적한 주택가까지. 이해하려면 오랜 자료 조사가 필요할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접는다. 이제 세계는 하나라는 생각으로.

사진@김서정 작가


드디어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들어서는데, 정문이 아니라 동문이다. 둥글둥글 전지한 가이즈카향나무들이 사열하듯 서 있는 게 마치 주렁주렁 매달린 애기봉분처럼 보여 처연하다. 가이즈카향나무가 일본 원산이라는 지식은 나무 아래로 가라앉고 오로지 인간이 벌인 인간들의 전쟁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들이 전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평화를 읽어보려는 마음에 숙연함이라는 단어가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여느 공동묘지보다 철저하게 계획된 의미 부여를 통해 조성되는 국립묘지들, 그곳에 묻힌다면 어차피 죽는 거 조국과 정의를 위해 일찍 생을 마감하는 희생은 숭고해 보인다. 거기에 전쟁 중 전사는 개인들의 개죽음이라는 사적 역사는 발 붙이기 힘들다. 개인을 지켜주는 제도 가운데 조국이라는 울타리만큼 생존지수를 높이는 개념은 없으니까.

그렇기에 어떤 이유가 있든 기꺼이 남의 나라에 와서 전쟁을 치르다 전사한 유엔군들의 무덤에 서니 사람이 할 수 있는 모든 사유가 총체적으로 터진다. 전쟁과 평화, 폭력과 비폭력, 우연과 필연, 개인과 국가, 삶과 죽음의 경계, 그리고 죽는다는 그 오래된 풀리지 않는 풀릴 수 없는 필멸자의 숙제가.

그건 삶(녹지지역)과 죽음(묘역) 사이의 경계라는 신성함을 함축하고 있다는, 최연소자(17세)인 호주병사(J P DAUNT)의 성을 따서 지은 도은트 수로를 거닐면서도, 한 걸음만 디뎌 죽음의 공간인 주묘역과 상징구역을 배회하면서도, 아래로 내려와 삶의 공간인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유엔군 유령탑, 무명용사의 길을 지나면서도 무거운 몸처럼 묵직하게 질문만 던질 뿐 해답의 실마리는 가닥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제 질문은 덮고 지나온 길에서 마주한, 최고의 조경기술로 관리받고 있는 식물을 떠올리며 답사의 주요 동기인 삶과 죽음의 경계 사유를 비언어로 지우려 애쓴다. 잔디와 묘비가 눈에 확 들어오는 국립묘지와 달리 푸른 영산홍 잎과 진홍빛 꽃들로 둘러싸인 2,333명의 안장자들, 그들이 살아서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는 신호를 끊임없이 던져주는 듯한 다양한 나무들의 정돈된 수형, 유한과 무한이 연결되는 그 순환에 자연성이 던져지자 길게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터널이 실제로 산 자들을 사열하는 듯하다.

잊지 않고 우리를 찾아와 줘서 감사하다며, 오래오래 꼭 기억해 다시는 전쟁으로 죽음을 기리는 공간은 남기지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단 하나뿐인 목숨 명령 없이 충분히 멋지게 마음껏 즐기다 가는 제도만이 남기를 희망한다며. 그곳을 거니는 한국 사람 반 외국 사람 반에게.

대한민국 내 대한민국 영토가 아닌 성지, 전 세계에서 유일한 묘지, 매년 11월 11일 11시 이곳을 향해 묵념을 하는 'Turn Toward Busan' 추모식 행사가 열리는 장소, 80여 종의 수목이 1만 그루 자라고 있는 아름다운 치유 정원, 그리고 인간의 개념인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를 무덤을 보며 나무를 보며 허물어뜨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을 나오는 데 중간에 펼친 우산이 짙게 젖어 있다.

부산이면 돼지국밥이라며 정문 앞을 돌아보는데 ‘소갈비찜+된장+공기밥’ 9,000원 메뉴가 보인다. 부산 올 때마다 먹었던 돼지국밥은 접기로 하고 가격이 저렴해 보이는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와 이기대공원 가기 전 공중화장실로 간다. 나와서 무심코 표지판을 보는데, ‘부산광역시 수목전시원’이라고 한다. 입구에 서니 ‘대연수목원’이라는 글자 아래 넓은 지도가 그려져 있다.

1978년부터 양묘장으로 운영되다가 2002년 시민들에 개방했다는 이곳 가는 순서를 보니, 침엽수원, 무궁화원, 유실수원, 오륙도원, 곤충체험학습장, 상록활엽관목원, 상록활엽교목원, 낙엽관목원, 낙엽교목원, 죽림원, 아열대식물체험장이다. 재한유엔기념공원에 던져진 질문들을 이기대공원 바다에 가 좀더 확대를 하든 바다에 실어버리든 온전히 자연만 보며 마치려고 했는데, 예정에 없던 나무 공부를 해야 한다.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들어간다. 중부지방 사는 이가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의 모습을 접할 기회는 드물기에. 지금의 인연은 아무래도 식물에 집중해 있다고 여기기에.

이기대공원@연합뉴스


넓은잎삼나무, 리기테다소나무, 아왜나무, 분비나무, 가시나무, 황금쥐똥나무, 처진소나무, 금테사철나무, 사스레피, 녹나무, 가시나무, 만첩빈도리, 시무나무, 검팽나무, 노랑꽃수수꽃다리, 참빗살나무, 해당화, 빈도리, 노린재나무, 치자나무 등등을 보고 아열대체험장을 나와 잠시 쉰다. 그때 관리인이 뒤틀린 용오름 같은 줄기에 잘게 조각 난 구름 같은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는 나무를 오래 들여다보는 게 보인다. 그가 떠나자마자 궁금해 다가가니 기증 받은 석류다.

오래 자란 석류를 본 감동을 안고 머릿속을 비우려 이기대공원으로 간다. 잠시 택시를 탄 뒤 내려 계단을 조금 오르니 동생말전망대가 나온다. 주변 식물은 식물로만 보기로 하고 바다 가까이 잡히는 광안대교와 해운대 그리고 그 위로 거대한 기둥처럼 솟은 고층 아파트를 본다. 문득 넓은 부산을 다 가본 느낌이 든다. 여기서 저기를 보고 저기서 여기를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낭만이 가득한 이기대 동생말전망대라는 글자를 글자 그대로 담고 낭만을 즐기자는 마음으로 해안산책로를 걷는다. 한 번은 나무를 보고 한 번은 바다를 보고. 보고 비우고 보고 비우는데 구름다리가 나온다. 안전한 기분으로 건너가 계속 걸으려고 하는데 눈에 들어온 안내판 문구를 지나칠 수가 없다.

“군사용 해안경계 철책 : 이곳은 과거 군부대에서 간첩침투 예방을 위해 설치한 해안경계용 철책으로써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아픈 역사의 흔적입니다. 이전까지는 민간인 출입을 통제하여 왔으나, 1997년 군사보호 지역 해제 조치로 현재는 누구나 이기대의 해안절경을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05년 『이기대 해안산책로 조성사업』을 계기로 주변 철책 들은 모두 철거하였으나, 이 부분은 후대까지 『역사 교육의 장』 으로 보존하기 위하여 남겨 놓은 곳입니다.”

머리를 비울 수가 없다. 자연이라고 자연만 볼 수는 없다. 자연을 유일하게 변형시킨 사람의 흔적을 항상 껴안고 봐야 한다. 두 명의 기생이 왜장을 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고도 하고 그냥 양반이 기생과 놀던 곳이라고도 해서 이기대(二妓臺)라는 명칭이 붙은 곳을 거닐면서도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을 기억해야 하듯이. 광대무변의 그럴듯한 사유가 출렁이면서도 저 바다를 건너온 침략 왜군도, 상반된 목표의 유엔군도 반드시 성찰해야 하듯이.

전쟁과 분단을 지울 수 없는 안내판 문구에서 그래도 당장 와닿는 단어는 ‘해안절경’이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는 의지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굵은 비가 내려도 그 소리를 압도하는 바다를 보며 걷는 이기대공원, 오륙도까지 가면 좋으려만 중간에 들러 부산 명물이라는 이재모피자도 포장을 해가야 하기에 서둘러 비탈을 오른다. 서울 남산 계단보다 짧지만 숨이 가쁘다.

금세 가늘어진 비가 얼굴을 적셔 준다 해도 몸은 무겁기만 하다. 바다와 산을 오르내리며 도시를 만들고 거기에서 계획 있는 삶을 사는 이들, 그들의 거주지에는 해수욕장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과 역사를 함께 들여다볼 수 있는 답사지들이 많다는 걸 아프게 느끼며 부산을 떠난다.

돌아오는 KTX, 4명이 마주보는 좌석에는 양쪽 모두 외국인들이 앉아 있다. 그러고 보니 갈 때도 그랬는데. 기차에 어둠이 깃들면서 희망한다. 세계가 하나이니 굳이 나라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없지 않을까. 그 생각을 갖게 해준 재한유엔기념공원, 대연수목원, 이기대공원과의 인연에 깊이 감사하며 집으로 간다. 희망이 희망으로 남질 않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