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 6킬로미터에 달하는 경춘선 숲길 시점은 월계동이고 종점은 담터마을이라고 한다.
더는 가지 못하는 이름의 길이라고 할 때 일정상 담터마을에서 시작하면 그곳이 시점이 되고 월계동이 종점이 된다. 시점과 종점은 있는가 없는가? 아니 공릉동 도깨비시장에 먼저 들러 배부터 채우고 걸으면 그곳은 중간지점인가 시점인가 종점인가?
경춘선 숲길은 시점과 종점으로 기억해야만 할까? 출발역이 있고 종착역이 있는 기찻길이었으니까. 그것도 아닌 듯하다. 내가 타는 곳이 시작이고 내가 내리는 곳이 끝이기에. 끝에서 내린 뒤 다시 그곳에서 타면 출발이 되고 이전에 탄 곳이 끝이기에.
1939년 완공된 경춘선은 강원도 조선인 민간 자본에 의해 개통된 철도였다. 침략과 수탈을 목적으로 일제가 세운 철도와는 시작이 달랐다고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이 철도도 결국 일제의 군수 물품과 산업자재를 나르는 역할을 많이 했다.
1946년 국유화되면서 수도권 중심에서 노선 변화를 겪다가 폐철길이 발생했고, 2013년부터 도시 재생 사업을 통해 2018년 경춘선 숲길이란 이름으로 도심 속 낭만 도보 여행 코스가 되어 크게 사랑받고 있다.
성북역(현 광운대역)에서 기름 냄새 풍기는 디젤기관차를 타고 경춘철교를 지나면 억압에서 해방된 들뜬 마음으로 목청껏 소리 지르며 마석으로 청평으로 대성리로 가평으로 강촌으로 내달린 중장년층들의 추억 경춘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춘천에 발 내린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듯한 경춘선, 철길 떨어진 어느 민박집에서 누구는 연인이 되고 누구는 혁명가가 되고 누구는 눈물 한 바가지 쏟으며 절망의 별빛을 보았을 경춘선, 세월 건너 다시 탄 전철에 쥐 오줌만큼의 낭만 추억이 틈입하지 못하면 경춘선 숲길을 걷자. 내딛지 못했던 철길에서 균형 잡아보며 흔들렸던 삶을 앞으로도 흔들릴 것 같은 삶을 나무를 보며 그 나무 끝이 가리키는 하늘을 보며 숨을 고르자.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겨울날 다시 생각난 경춘선 숲길, 전 구간 걷기는 감기를 불러올지도 몰라 잔꾀를 낸다. 시작하는 곳이 시점이고 끝나는 곳이 종점이라 얄팍하게 대신하고는 그때 어디서 시작했는지 떠오르는 대로 되살리며 전철을 탄다. 공릉역은 너무 중간인 것 같아 슬며시 뒤로 밀고는 역시 얄팍한 양심상 전역인 태릉입구에 덜컥 내려버린다. 이제 경춘선 숲길을 걸어야 하는데 바깥 풍경이 낯설다. 무턱대고 걷는다. 가다 보면 나오겠지.
두꺼운 청바지는 허리띠가 슬쩍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얇은 청바지로 견디며 걷는데 감기가 반기겠다는 느낌이 오는 순간 도로 건너 익숙한 풍경이 나타난다. 경춘선 숲길이다. 횡단보도까지 찾아가 보니 화랑대역이다. 여기서 출발해 많이 걸었는데 왜 기억이 안 났을까? 자주 출발했던 출발지인 집이 아니라 오늘 출발지가 다른 곳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7호선 태릉입구 다음 역은 공릉이고 6호선 태릉입구 다음 역은 화랑대이고. 이 혼돈을 자연도 헷갈리는 기후 변화 속에 척후병처럼 찾아온 강추위로 돌리며 겨울 경춘선 숲길을 걷는다.
시멘트 포장 사이로 드러나는 빼빼로 같은 철로도, 침목 간격 공간이 주는 여백 양옆으로 뻗어 있는 철로도 발을 디디고 걷는 것만으로도 느낌이 좋다.
방향을 잃을 때 방향이 되어주는 듯한 철로를 육중한 쇳덩어리에 몸을 싣지 않고 온전히 내 의지로 걷다 보면 그 어떤 길로 가든 멋지고 아름다운 방향을 찾을 것 같다. 그래서 어지럽고 힘들 때 다시 먹고 싶은 엄마 밥상처럼 여기며 그 길을 걸으면 모든 게 푸근해지는 듯하다.
그래도 찬바람이 고드름처럼 파고드는 추위를 이길 재간이 없어 조금만 더 걷다 중단할까 하는데, 분홍 립스틱에서 빨간 립스틱으로 변해가는 화살나무 단풍 사이사이 광합성을 보충해야 하는 듯 초록 잎들이 간혹 눈에 들어온다. 저 푸른 잎이 단풍까지 갈지 갑자기 훅 부는 바람에 초록으로 떨어질지 걱정이 인다.
“지난주 금요일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뒤에 토요일 나와 보니까 나뭇잎이 한꺼번에 우수수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곳 일대를 13년간 쓸고 있는데 이렇게 초록색 이파리가 한꺼번에 진 것은 지금껏 처음 보는 일입니다. 시기도 보통 11월 말쯤 되어야 나뭇잎이 다 떨어지는 데 평소보다 1주일 정도 빨리 떨어진 거 같습니다.”
이른바 초록 낙엽 사태에 대한 취재 기사에 실린 청소노동자 홍 모 씨의 말이다. 나뭇잎 색조가 변하는 건 오로지 겨울을 나기 위한 수순이다. 그건 기온이 만드는 절차이다.
그런데 광합성을 중지해야 할 시점의 온도가 오지 않아 초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때 급하게 기온이 널을 뛰어 종점을 고한다. 몸통이 살아야 하니 이파리의 화려한 변신은 중요하지 않다. 시작, 중간, 끝이라는 게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저 발 빠르게 살아야 한다. 본래 그게 자연 질서인 듯 말이다.
언젠가가 아니라 이른 시일 내에 가을 단풍이 주는 색감 가득한 사유는 폐지될 듯한 현실에 우울한 것도 잠시 화살나무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진화 과정이 눈물겹게 다가온다.
그것은 화살나무 줄기 주위의 코르크 날개에 있는 주요 성분인 수베린이라는 지방산은 초식동물이 갉아 먹어 생길 수 있는 상처를 보호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낸 화학물질이라는 것이다. 없던 물질도 오로지 생존을 위해 다른 자연 요소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산할 수 있는 생명의 힘, 아마 단풍을 건너뛰게 되어야 할 상황이 오면 분명 새로운 모습의 잎을 보여줄 것이다. 그래도 가을 단풍이 주는 겨울 채비는 꼭 있어야 할 듯한데.
자연의 생명체는 자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절차를 바꾸어갈 수 있는데, 그 자연의 생명체를 우리가 살기 위해 줄여가는 우리의 행보는 자연인가 반자연인가. 그 종점은 어디인가.
추위도 우울감도 짙어지는 사이 걷기를 멈추고 싶은 얕은 이기심이 촉발할 무렵 초록으로 보았던 미루나무 길이 탈색되어 가도 화폭에 담긴 아름다운 그림으로 펼쳐진다. 자연이 아니라 미술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몇 년 전 여름 미루나무 길을 걷고 돌아온 뒤 미루나무일까, 양버들일까. 이태리포푸라일까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만난 모네의 포플러 연작 시리즈가 준 감동이 다시 휘몰아쳐 오기 때문이다.
나무를 볼 때마다 아주 잠시라도 평생 찰나로 변하는 빛을 그림에 담으려고 분투했던 모네의 예술혼을 이해하려고 애는 써보지만, 하루 종일 한 나무를 본 적이 아직 없는 걸 확인해 보면 모네에 대한 존경심은 나무를 통해 더욱더 커져만 간다.
세상 모든 게 단 한 순간도 같지 않다는 걸 지구 생명의 근원인 햇빛을 통해 그것이 내리쏟아지는 초, 분, 시간을 넘어 사계절 담아내는 모네의 본질보다 위대한 인상주의적인 삶, 그걸 완전히 담을 수 없을 것 같아 마지막 얄팍한 타협으로 경춘선 숲길을 벗어난다. 미루나무 길을 걷다 보면 감기가 생존에 위협을 줄 것 같고 모네를 흠모하는 사람치고는 너무 노력하지 않은 것 같기에.
그래도 그동안 여름, 가을 그리고 이제 겨울을 봤으니 마지막 이른 봄만 보면 모네처럼 뜨겁지는 못하더라도 경춘선 숲길에 대한 작은 예의는 갖추는 것 아닐까. 그래, 내년 봄이라는 게 또 오면 모네의 포플러 연작 시리즈가 주는 진정한 의미를 쥐 오줌만큼이라도 느낄 수 있으려나. 그때 그 낭만 열차가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시점과 종점이 무의미하더라도 아마 그곳 나무들이 넌지시 일러줄 것도 같고. 늘 그렇듯이 나무들이!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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