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여위어 가는 가로수 별이 지는 가로수

김서정 승인 2023.11.09 15:39 의견 0
양버즘나무 가로수@김서정작가


[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볼품없이 측은하게 서울 나무가 죽어간다.”
2019년 방영된 KBS 스페셜 [서울 나무, 파리 나무] 첫 멘트다. 이어지는 멘트는 다음과 같다.

“반면 같은 수종인데도 파리의 나무는 아름답고 품위 있다.”방송에서 보여주는 나무는 양버즘나무로 불러야 하는 플라타너스이다. 서울 나무와 파리 나무, 무슨 차이가 있어 이렇게 극단적인 비교의 문장이 나왔을까? 프랑스 공원 관리자가 그 답을 말한다.

“나무들이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자라도록 해준 것입니다.”즉 파리 나무는 자연 상태로 자라도록 소극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이고, 서울 나무는 아주 무지막지하게 인위적으로 관리한다는 것이다. 그 결정판은 바로 가로수이다.

환경생태 연구활동가 최진우 박사는 사람들이 문밖을 나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자연물이 가로수라고 한다. 그래서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도시를 만드는 일은 동네의 나무와 숲을 아끼고 보살피는 시민의 마음과 행동에서부터 시작됩니다”라고 말하며 “사실 그 마음과 행동이 없이는 저 멀리 있는 북극곰을 살릴 수도 없으며, 설악산의 산양과 지리산의 반달가슴곰을 지킬 수도 없습니다”라고 강변한다.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매탄3동 가로수길에서 환경관리원들이 전동송풍기로 쌓인 낙엽을 청소하고 있다@연합뉴스


집밖에 나서서 처음 만난다는 자연인 가로수, 눈여겨보기 쉽지 않다. 갈 길이 바쁘기도 하지만, 핸드폰에서 눈을 떼기가 두렵기도 하지만, 우두커니 서서 감상할 만한 모양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닭발 같은 흉흉한 자태, 철거되는 건물에서 마지막 남은 원기둥 같은 죽음의 그림자, 자연스레 정감이 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나무가 주었던 그늘도 오래전 망각되어 덥거나 추우면 카페로 직행하는 도시민의 삶, 버젓이 존재하는 가로수는 자연스레 존재감이 없는 유령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그 삶은 당연히 우리가 만들어낸 풍경 속에서 출몰하는 자연스러운 비극이 되어 버렸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 나오는 장면을 보자.
동네 슈퍼마켓 평상에서 이제훈이 나문희에게 묻는다.
“서면이 어딨는지 아세요?”
그러자 옆에 있던 염혜란이 대신 대답한다.
“서면은 부산 한복판에 있다 아이가.”
이제훈이 답한다.
“서면은 가로수 그늘 아래 있어요.”

이문세 노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을 말하는 것이다. 노래를 모르면 어이없는 웃음이 나오지만, 노래를 알면 낭만이 묻어온다. 노래를 모르더라도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무언가 일상의 탈출이 펼쳐질 듯한 상상이 발동한다. 그것도 꽤 좋은 느낌으로.
숲해설 현장에서 가로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잠시 이제훈이 되어 과감히 서면이 어디 있냐는 말을 건네본다. 아재 개그라는 걸 알게 되면 기가 차다는 웃음을 보내온다. 뻔뻔하게도 굴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문세 노래를 들으면 가을을 가로수에서 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라일락 꽃향기에 담겨 있던 사랑이 라일락 쓴 잎처럼 슬프지만 나뭇잎 떨어지는 가을, 즉 여위어 가는 가로수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다시 기억합니다. 그리고 별이 지는 가로수에서 그 아름다운 사랑을 더 진하게 기억합니다. 가로수가 매개가 된 아름다운 가을 사랑입니다.”

그러고는 묻는다. 가로수에 얽힌 사랑 혹은 낭만이 있느냐고. 거의 없다고 한다. 벚꽃이 활짝 피거나 은행잎이 노랗게 떨어지는 계절에만 그곳에 가로수가 있다는 걸 기쁘게 만끽할 뿐, 일상에서 가로수 존재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

분명 우리들이 필요해서 심었을 텐데, 그 어느 때 처참히 가지들이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왜 심었는지 도통 이해불가의 상황에 좌절한 뒤 지속적인 외면에 직면하는 가로수, 그 상처에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도시를 걷는 발걸음은 늘 휘청거린다. 도시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자연인데 말이다.

여의도역 5번 출구로 나간 뒤 뒤로 돌아 여의도백화점 쪽으로 가다 보면 버스정류장 주변으로 양버즘나무 가로수를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은행나무 다음으로 많이 식재되었다는 양버즘나무들이라 어느 곳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은행@김서정작가


따라서 특별한 그림은 아니지만,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건 아래 줄기에서 나뭇가지를 내는 그악스러운 모습이다. 윗가지가 있고 거기에 넓은 잎들이 이미 있다면, 그 아래에서 가지를 내고 잎을 다는 게 비효율적이다. 위의 잎 때문에 아래 잎은 광합성을 하기 위한 빛을 적게 받아 에너지 생산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난감한 조건인데도 부득불 가지를 내고 잎을 내는 건 위의 잎만으로는 자기 몸을 감당할 에너지를 만들 수 없어서다. 그래서 위쪽 어디선가 가지를 내고 잎을 내야 하는데 그곳은 나무의 머리를 자르는 두절이 행해진 곳이라 새살을 내고 자랄 세포들이 거의 죽어 있다.

결국 줄기 그 어느 곳이든 살아 있는 세포가 전체 나무를 살리기 위해 이후 전개될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도 기어코 생명을 뻗어 나가고 보는 것이다. 도심 속이라는 악조건에서도 사람들의 일방적인 판단에서도 어떻게든 가까스로 살아가겠다는 그 토착 정신에 박수를 보내지만, 그 멈춤의 시선에서 끼쳐오는 건 자연과 인간의 공생은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울림이다. 우리는 자연을 자원으로만 볼 뿐 우리의 이익으로만 볼 뿐이기 때문이다.

수명을 다해 간혹 쓰러지는 양버즘나무 때문에 수종 교체가 이루어진다고 하는데, [서울 나무, 파리 나무]를 보면,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아직도 잘 자라고 있는 세계 최고령 양버즘나무가 나온다. 무려 2,200여 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걸 보고 있으면, 양버즘나무 평균 수령이 100여 년이라는 건 매해 자르고 자르는 우리의 강전지로 받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병든 수명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인류의 진화 역사는 도시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쪽으로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숲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도 숲에서 살았던 본성을 버리지 못해 가로수라도 심어 숲의 느낌을 가지려고 하는 것 같다.

이는 조경의 측면도 있겠지만 나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삭막함을 무의식에서 배제하는 우리의 인식 활동이 만들어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바로 그 무의식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가로수에 대한 관심은 적을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도 가을날 발아래 밟히기 직전의 은행알을 보면 가로수 존재는 만감이 교차하면서 다가올 것이다.

은행나무가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건 공해에 강한 면도 있지만 나무 가운데 불에 잘 타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다. 즉 본래 불에 잘 타는 나무가 불에 잘 타지 않아 방화벽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데, 그 기준 또한 우리라고 보면 자책의 무게가 감당이 안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건 적당히 아니라 늘 파괴적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일을 멈출 수도 없는 노릇, 그저 모순을 안고 사는 종(種)이 인간이라는 인식만이라고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 좋은 대안이 나오지 않을까? 그래도 조심을 기해도 밟혀 버린 은행알에서 번져오는 지독한 냄새는 걸으면서 몹시 신경이 쓰일 것이다. 결국 우리가 심은 은행나무가 원성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은행알이 떨어지는 암나무는 과감히 도시에서 제거되고 있는 중이다.

나무와 도시를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가지치기 방법, 그 풍경이 만들어낸 서울 나무와 파리 나무, 종국에는 나무를 대하는 문화까지 거론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래서 가을이 오면 이문세의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은 더 애틋하면서도 생태적으로 다가온다. 여위어 가는 가로수, 별이 지는 가로수, 거기에 사랑의 향기가 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걸 잊지 않으면 가로수에서 사랑의 향기를 느끼기 위해 좀더 사랑스럽게 관리하려고 들지 않을까? 자연 그대로 자라는 모습으로!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작권자 ⓒ 뉴스임팩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