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 광화문 광장에 가면 당산목을 떠올려 보자

김서정 승인 2023.08.19 07:06 의견 0

광화문 광장.@연합뉴스

[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 제가끔 서 있더군 // 제가끔 서 있어도 나무들은 / 숲이었어 // 광화문 지하도를 지나며 / 숱한 사람들이 만나지만 / 왜 그들은 숲이 아닌가 // 이 메마른 땅을 외롭게 지나치며 / 낯선 그대와 만날 때 // 그대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1970년 발표된 정희성 시인의 ‘숲’이다. 당시 광화문 앞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경복궁과 광화문 사이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이 있었고, 세종문화회관 자리에는 서울시민회관이 있었고, 감동의 문장을 걸어 힐링을 주는 교보 빌딩은 아예 없었다. 그 사이 도로를 달리는 차들은 은행나무 가로수를 기억했고, 또 그 사이 이순신 장군만을 우러르며 광화문 대로를 오고갔다.

그럼 시에서 말하는 광화문 지하도에는 왜 그리 사람들이 많았을까? 지금처럼 지상의 횡단보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연합뉴스

광화문 앞 과거 풍경을 잠깐 보자.

“남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 했는데, 다락[樓] 3간이 상·하층이 있고, 다락 위에 종과 북을 달아서, 새벽과 저녁을 알리게 하고 중엄(中嚴)을 경계했으며,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議政府)·삼군부(三軍府)·육조(六曹)·사헌부(司憲府) 등의 각사(各司) 공청이 벌여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글이다. 이를 읊은 권근의 시 일부를 보자.

“줄처럼 곧고 긴 거리가 넓고 / 별처럼 둘러싼 여러 관청이 나뉘어 있네. // 궁궐문으로 관리들이 구름처럼 모이는데 / 훌륭한 선비들이 밝은 임금 보좌하네.”

왕자의 난 이후 폐지된 삼군부 자리에 예조가 옮겨왔고, 이후 오랫동안 광화문 동쪽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가 있었고, 서쪽에는 예조, 중추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 장예원이 있었다. 즉 조선의 광화문 광장은 관리들의 일터였다.

그 뒤 조선을 빼앗은 일제는 육조거리를 그대로 놔두면서 광화문통이라 불렀고, 한국전쟁을 겪으며 광화문 일대는 폐허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재건사업을 통해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늘어나는 차량들로 정체현상이 극심해지자 정희성의 ‘숲’에 나오는 광화문 지하도를 1966년 전광석화로 만들어냈다.

광화문 광장 모습.@김서정 작가

그 무렵 서쪽으로 30m, 1971년 동쪽으로 20m를 넓혀 너비 100m의 세종로가 만들어졌다. 그러고도 숱하게 그 공간은 구조 변경을 했다. 그곳을 정치적으로 상징화시킬 수 있는 정치인들의 세력 교체가 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거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광화문 역사에서 큰 상처를 받은 건 은행나무였다. 일제강점기에 육조거리 중심축을 훼손하기 위해 일제가 심었다는 30여 그루의 은행나무들은 중심에서 밀리고 밀려 광화문 광장에서는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창 리모델링 중인 KT 사옥 앞에 있던 은행나무도 자취를 감추었다.

정부종합청사 쪽으로 가야 만날 수 있는 은행나무, 그래도 광화문 광장 주위 어딘가에 또 있을 법한데, 이를 연상시키는 은행나무가 뒷전으로 밀려났으니 은행나무 기억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은행나무가 밀려난 대신 광화문 숲이 생겼다. 서울시 소개에 따르면, “광화문 광장은 기존보다 녹지 면적이 3.3배 늘어났고 5,000그루의 나무들이 식재되었다”면서 광화문 광장 초입은 ‘소나무정원’, 사헌부 문터에는 배롱나무가 있는 ‘시간의정원’, 이어서 ‘사계정원’을 조성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산수유나무, 쑥부쟁이, 무궁화, 백당나무, 쥐똥나무 그리고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이끼와 고사리가 어우러지게 했다고 한다.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상수리나무와 굴참나무, 졸참나무까지 다양한 참나무들이 식재되어 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팽나무도 심었다고 한다. 이외에도 마가목, 부처꽃, 목수국, 배초향, 부용, 범부채 등을 심었다고 한다.

광화문 광장 조형물.@김서정 작가

자연 숲이 아니고 인공 숲인 만큼 나무와 풀 상태에 따라 해마다 종류가 달라지겠지만, 그래도 가장 듬직해 보이는 건 느티나무이다. 거기에 바닷가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지만 이왕 옮겨 온 거 도심에 잘 적응해 오래 살았으면 하는 팽나무이다. 두 나무는 당산목으로 불리는 수호신 같은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초록 덮개> 책을 보면,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언어가 발달해 지식을 서로 교환하고 점점 더 짜임새 있게 보존할 수 있게 되면서, 초기 조상들은 주변 환경에서 더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식물을 채집하기보다는 재배하기 시작했다”면서 “그와 동시에 식물의 실용적인 측면과 정신적인 측면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새로운 해석은 계절 변화를 토대로 삼는 온갖 비법과 마법을 탄생시켰고, 나아가 식물 세계에 초점을 맞춘 체계화한 종교를 낳았다”고 한다.

당산목을 이해하는 키워드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우리 조상들은 생존을 위해 나무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텐데, 그 과정에서 나무가 가진 긴 생명력에서 영원성을 보았을 것이다. 즉 거기에 깃든 정령이 분명 인간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을 것이고 그 뒤 부여하기 시작한 나무의 정신적인 측면이 당산목이라는 신앙을 낳았을 것이다.

우리보다 키가 크고 우리가 사는 마을보다 높은 당산(堂山)에 있어 하늘 가까이 닿아 있는 그 나무를 정성스레 모시고 소원을 빌면 현재보다 나은 삶을 가져다준다는 믿음 말이다.

하지만 산업혁명과 과학기술혁명이 가져온 실용성의 해부에 대한 완벽한 자신감이 우리를 제외한 사물들의 정신성을 말살시켰고, 그 결과 지구 열대화라는 참혹한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현재의 편안한 삶에 만족하지 못해 우리만을 위한 도시 건설에 빠져 있다. 그 어떤 상상도 뚝딱뚝딱 현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나름 강한 정신력 때문이다.

지난 6월 축구팬들이 광화문에서 20세 이하(U-20) 월드컵 4강전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연합뉴스

우리도 살고 나무도 살고 지구의 다양한 생명들이 지금 예측보다 오래 살려면 광화문 광장에 가서 잠시라도 나무를 둘러보자. 그러면서 <초록 덮개>에 나오는 다음 글을 기억해 보자.

“의식이 최초로 각성한 이래로 수천 년 동안 인류가 식물과 관계를 맺어온 방식은 그것(우리는 나무의 정신적인 힘에 이끌리며, 드넓은 숲으로 들어가면 살아 있는 숲과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과 전혀 달랐다. 우리는 온갖 사회적 이유들을 들어 식물의 왕국을 계속해서 착취해왔다.

그 중에는 실용과 기능만 고려한 이유들도 많다. 식물은 농업과 세계 경제의 기반이 되어왔으며, 앞으로 그럴 계속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에서 우리가 종종 경솔한 행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식물이 인류에게 의존하는 것보다 우리가 식물에게 더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류는 최근에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점점 잊는 게 있다. 나무의 정신적인 면에 대한 받아들임이 거의 상실되었다. 그 모두를 아우르는 신의 등장이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본디 나무와 함께 생장한 우리들, 나무에도 정신이 있다고 여기면, 나무에도 영혼이 있다고 여기면,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에 영혼이 있다고 여기면, 우리만을 위한 이기적인 도시 건설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다.

느티나무보다 팽나무보다 1억 년 전이나 먼저 나타났다는 은행나무 흔적이 지워진 광화문 광장이지만, 전보다 많은 나무가 있고, 거기서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보며 당산목 정신을 띄워 보면 다음과 같은 패러디 시가 나오지 않을까.

“광화문 광장에 가 보니 사람들은 / 구름처럼 몰려다니더군 // 젓가락 들어갈 틈 없이 뭉쳐 있어도 사람들은 / 제가끔이었어 // 광화문 숲에 가 보니 나무들은 / 숲을 이루고 있었어 // 군중 속에서 고독감이 밀려오면 / 숲으로 가 // 당산목들이 그대들을 품어줄 거야 / 말없이 넉넉하게”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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