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꿈 100년 2편] 해방, 항공산업의 시작

이정희 기자(leefran73@naver.com) 승인 2020.03.01 09:34 의견 0

[뉴스임팩트=이정희기자] 1948년 10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첫 민간 항공사가 탄생했다. 대한국민항공사다. 미국산 스틴슨 108 항공기 3대로 시작했다. 운영 노선은 부산~제주, 서울~부산, 서울~광주, 서울~군산 노선 등이었다. 1954년엔 서울~대만~홍콩 노선도 개설됐다.

대한국민항공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수요 부족으로 적자가 누적돼서다. 1962년 대한국민항공사는 문을 닫았다.

15년 만에 끝났지만 대한국민항공사는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55년 이뤄진 국내 항공업 사상 최초 태평양 횡단 비행이다. 쓰인 항공기는 DC-3(우남호)였다. 우남호는 하와이로 가 동포 46명을 싣고 국내로 돌아왔다.

대한국민항공사의 빈자리는 공기업이 메꿨다. 대한항공공사다. 1962년 발족했다. 흑자 전환에 실패해 1969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의미 있는 기록을 하나 썼다. 서울~오사카 노선이다. 1964년 취항한 첫 한일 정기 노선이었다.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한 기업은 한진상사였다. 지금의 한진그룹이다. 한진상사는 1969년 대한항공을 출범했다. 직원 수는 514명이었다. 운용하는 항공기는 DC-3 2대, DC-4 1대, F-27 2대, DC-9 1대, FC-27 2대였다.

대한항공은 고도 성장기였던 경제 상황에 힘입어 몸집을 불렸다. 1972년 최초 미주 여객 노선을 취항했다. 서울~도쿄~호놀룰루~LA 노선이었다. 1975년엔 유럽 노선을 취항했다.

1973년 대한항공은 보잉 B747-200B를 도입했다. 최대 좌석 수가 500석이 넘는 대형 여객기였다. 미주, 한일 노선에 보잉 B747-200B가 다니면서 대량 수송 시대가 열렸다. 이후 대한항공은 보잉, 에어버스 등에서 항공기를 꾸준히 들여왔다. 1979년 기준 대한항공이 보유한 항공기는 41대에 달했다.

민간 항공업이 커지는 동안 군수 쪽은 어땠을까. 군수도 꾸준히 성장했다. 6·25 전쟁이 기폭제였다.

한국군 최초 전투기는 6·25가 터지기 전인 1948년 도입됐다. 연락 정찰기 L-4 10대였다. 6·25가 진행되면서 한국군은 미군에게서 F-51 등을 공여받았다. F-86, F-5A 등도 운용했다.

창정비는 1951년 11월 대구 제80항공창에서 본격화됐다. 노후 군사 장비를 분해해 점검하고 낡은 부품을 교체한 뒤 다시 조립하는 게 창정비다. 노후 군사 장비가 처음 배치됐을 때와 같은 성능을 내도록 만들려고 창정비를 한다.

제80항공창은 1952년 경남 사천시로 이전했다. 제80항공본창으로 규모도 확대됐다. 1955년엔 옛 진해시(현 경남 창원시 진해구) 공군 기지로 옮겨졌다. 진해 시절부터 항공기 창정비가 체계화됐다.

6·25 중이던 1953년 6월. 이승만 대통령 지시로 군은 국내 최초 군용기 개발에 착수했다. 초등 훈련용 2인승 경비행기였다. 스펙은 엔진 미국제 85마력 O-190-1 4기통, 최대마력 85HP, 최대속도 180㎞/h, 순항속도 145㎞/h, 자체 중량 380㎏, 최대 이륙 중량 600㎏였다.

비행기는 1953년 10월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1954년 4월 명명식이 치러졌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름을 붙였다. 부활호였다. 피폐해진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키라는 뜻이 담겼다.

부활호는 1960년까지 훈련용으로 사용됐다. 여건 미비로 2호기는 제작되지 않았다. 그렇게 부활호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2004년 부활호가 발견됐다. 대구 경상공고 지하 창고에서 뼈대만 남은 상태였다. 부활호 복원 작업이 개시됐다. 공군군수사령부 예하 제51항공정비창이 협조해줬다. 그해 10월 부활호는 다시 날아올랐다. 근대문화재로도 등록됐다. 현재는 공군사관학교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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