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 창경궁에서 와룡공원, 청와대 등산로에 온 봄

김서정 승인 2024.04.06 01:00 의견 0
창경궁의 생강나무에 꽃이피었다@김서정 작가


[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 겨울 내내 일주일에 한 번 전문 강사가 이끄는 탐조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마지막 탐조는 3월 14일 창경궁이었다. 3년 전 숲해설을 했던 곳이라 익숙했지만, 그때 새를 보았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혹 스쳐 날아가거나 소리가 들려오거나 나뭇가지에 앉아 있거나 어떤 형태로든 새가 존재를 알렸을 테지만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 아무런 연결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궁에 나무가 있는 곳이 아니라 나무에 새가 있는 곳으로 생각하려고 애는 썼다.

그래도 창경궁에 들어가고 나니 오랜만에 본 나무들이 반갑다. 홍화문 앞 옥천교 주변의 매실나무, 살구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 등에 꽃이 피지는 않았지만, 꽃이 피었을 때 모습을 떠올려보니 봄기운이 오른다. 온실 방향으로 들어가니 백송, 층층나무도 그대로 있고 창경궁의 명물인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연리지도 여전히 사랑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거기서 대각선을 그은 쪽에 시선을 보내니 이른 봄 가장 먼저 잎을 내는 귀룽나무도 곧 연둣빛을 내려는 듯 푸르지 않지만 푸르게 보인다. 눈앞의 장면을 마음대로 변색해 걸으니 겨울은 씻긴 듯 사라지고 털실 매달린 외투가 거추장스럽게 다가온다. 하지만 벗는 순간 찬기가 느껴질 건 뻔한 기온, 날씨보다 더 변덕스러운 생각에 일침을 놓는 소리가 들려온다.

“양진이다.”
길옆에 만들어놓은 실개천 주위를 왔다 갔다 하는 새들을 보며 크지 않게 지른 탐조인들의 환호성이다. 얼른 줄을 서서 필드스코프에 눈을 바짝 댄다. 어, 새 만드는 도예가 분이 선물해준 양진이가 아니다. 참새 크기로 붉은색 기운이 빛나는 작품을 볼 때마다 이름을 잊어버려 도감에서 자주 확인했던 그 새의 색감이 계절에 맞춰 바래진 것일까? 야생의 양진이를 봤다는 매혹도 잠시 갸우뚱하면서 도감을 꺼내 보니 수컷은 붉은색이고 암컷은 붉은 기운 없이 황갈색에 가슴 부분만 붉은색을 띤다고 한다.

소생물 서식공간(백악산)@김서정 작가


분명 그렇게 되어 있는데도 양진이는 무조건 붉은색으로만 기억한 탓인지 감흥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치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먼저 본 여행지를 현장에서 재확인하며 감탄하는 본말전도의 일체감이 어긋난 경우와 같다. 그럴수록 도자기 작품 양진이가 더 보고 싶은 건 또 뭘까? 핏빛 색조가 아프도록 진한 자극을 주었기 때문일까? 그랬던 것 같다. 연한 연둣빛 책장 위에 양진이가 놓였던 순간 그곳 포인트는 붉은 반사로 번져갔기 때문이다.

양진이를 봤다고 해야 하는지 안 봤다고 해야 하는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며 동동거리는데, 또 크지 않은 환호성이 나온다.
“유리딱새다.”

탐조 나올 때마다 관찰 횟수가 높은 딱새를 도감에서 보다 보면, 전체적으로 파란색을 띠고 있는 유리딱새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름이 익숙한 파랑새인가 싶어 얼른 보면 거기에는 유리딱새라고 써 있고, 그래서 파랑새를 찾아보면 푸른 녹색이라고 나와 있다. 실제로 파랑새를 본 적이 있다면 파랑 이미지를 씻어버렸을 텐데, 그러지 못하니 유리딱새를 보면서 파랑새를 떠올려버린다. 이제 유리딱새라도 보게 되니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덧칠을 한 편견을 지울 것 같았는데, 어라, 눈앞의 유리딱새는 파란색이 아니다. 등은 갈색이고 옆구리는 노란빛을 띠고 배는 흰색이다. 암컷이란다. 파란색은 수컷이고.

백악정@김서정 작가


암수가 서로 다른 색깔을 하고 있는 새들은 암수의 생존 방식이 다르다는 뜻일 게다. 조류는 대개 수컷이 암컷보다 화려한 색의 깃털을 갖는다고 하는데, 이는 암컷보다 수컷이 더 부지런히 짝을 구하는 쪽이기 때문이란다. 그래도 그렇지 신비스럽기만 한데, 그 모습이 헤아리기 어려운 진화의 과정에서 발현된 거라고 하면 연구자가 아닌 이상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게 속이 편하다. 그저 사람과 다른 모습에 경외감을 보내기만 하면 될 듯하다. 우리보다 더 뛰어난 생존 전략이 우리보다 더 뛰어난 아름다움을 만들었다고 찬탄하면 될 듯하다. 그렇게 자연에 대한 존중감을 높여가면 되지 않을까.

현실에서 마주하지 못한 대상에 품고 있던 그리움이 막상 현실에서 무너지는 탓인지 기력이 빠지는 것 같다. 그러자 나무들에게 눈길이 간다. 새보다는 더 오래 보았다는 느낌이기에.

부지런을 떨어야 볼 수 있는 복수초, 노루귀를 숲속이 아닌 창경궁 야생화 정원에서 본다. 고생한 걸음 끝에 마주해야 전율이 일었을 텐데 느닷없이 발아래 채인 기분이라 진동이 덜하지만 그래도 탐조 덕분에 보게 된 거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 순간 식물도 암수 딴 색을 하는가 싶은 질문이 불쑥 생기는데 난감하다.

던져진 질문이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감당하기 어렵기에. 그래서 생각을 비우고 보았던 색만 떠올리며 창경궁을 돈다. 하얀 별꽃, 노란 생강나무 꽃, 노란 히어리 꽃이 영원하길 바라며.점심 먹고 길을 이어간다.

백악산 아래 청와대 가는 등산로를 가본 적이 없어서다. 새도 잊고 나무도 잊고 오로지 나만 살피며 걸어간다. 오랫동안 그랬듯이 길을 가는 내가 가는 것인지 길이 나를 이끄는 것인지 내가 길인지 길이 나인지 선문답 같은 애매한 질문에 쾌감을 얻으며 질질 발을 끈다. 서울과학고를 지나 와룡공원으로 향한다. 높은 계단에 헉헉 숨을 고르다가 한양도성을 쳐다본다. 조상님들의 노고에 깊은 반성을 하고 꾸역꾸역 숙정문으로 걷는다. 가는 길에 노란 산수유, 개나리도 반갑다. 봄이 왔구나.

숙정문에서 곡성으로 가지 않고 백악산 7부 능선 따라 이어진 길로 접어든다. 창의문에서 출발해 백악 정상을 찍고 청운대를 거쳐 숙정문으로 문화 해설하러 다니는 동안 마루금 아래 숲이 궁금했다. 청와대를 지킨다고 곳곳에 벙커와 비밀병기들이 있을 것 같은 상상이 걸리적거렸다. 견고한 성곽만으로도 쉽게 접근할 마음을 먹지 않을 것 같은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새로운 무기로 철벽 방어를 한다는 게 맞지만, 경계가 두터울수록 평화로 지키는 평화는 멀어진다는 생각을 품었기에.

칠궁 하산 길@김서정 작가


이제 백악 숲에는 데크길이 내내 이어진다. 둥근 CCTV 때문에 마려운 오줌도 참아야 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침입자를 막는 태세는 보이지 않는다. 박새가 딱따구리처럼 나무를 쪼고, 바위산이고 양지라 소나무가 참나무보다 우세하고, 작은 곤충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폐목재를 쌓아놓은 소생물 서식공간이 공존을 느끼게 한다.

오로지 사람만의 공간을 위해 변경되기 시작했던 숲에 다양한 생물들이 깃들어 살기를 바라는 실천, 이 길도 다시 폐쇄하면 더 자연다워지겠지만 사람이 자연과 주고받는 상호작용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서식지 확보, 늘 그 경계의 선이 다툼을 낳는다. 사람과 사람끼리의 끊이지 않는 충돌을.

청운대 전망대로 오르지 않고 만세동방 약수터를 거쳐 청와대 전망길을 걸어본다. 백악 정상보다 눈높이가 조금 낮아졌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다. 다만 광화문에서 백악산을 볼 때 정상 아래로 내려오고 싶은 욕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고, 백악정을 지나 위를 올려다 볼 때 심하게 가파르지 않다는 걸 확인하니 언젠가 밟아보고 싶은 생각이 짙어진다.

가지 않아야 더 많은 생물들이 살아간다는 생각을 잠시 접었다는 생각에 모순을 느끼면서도 꿈을 꿔본다. 이럴 때마다 경계를 뚫고 싶은 마음을 버릴 수는 없나 보다. 그곳을 왜 당신만 가져야 하나, 나도 갖고 싶다는 욕구 말이다.

하산을 위해 칠궁 방면으로 걸으며 놀란다. 청와대 뒤에도 담이 있었구나. 그 너머에 더 큰 성곽이 있는데. 그때 담장 위에 앉은 꿩 수컷 장끼를 본다. 빨갛고 파랗고 하얗고 꺼멓고 누렇고. 갖가지 색들이 선이 있는 듯 없는 듯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게 아름다울 뿐이다.

그러면서 열려 있는 육중한 철문을 나오는 데 쾌감이 인다. 그 옆 도로를 지날 때마다 닫힌 문 안의 세상이 궁금했는데, 단 한 번의 산행으로도 모든 게 해결된 것 같다. 나도 이제 이곳을 가졌다는 생각이 들기에. 그래도 버려야 한다. 자연은 사는 곳이지 소유하는 곳이 아니니까. 모든 절망은 소유욕에서 오니까. 그래도 마음으로 새와 청와대 등산로를 소유한 하루 걷기, 적은 소유에도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그게 자연의 마음이기에.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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