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 서평] 고려아연 분쟁과 '문 앞의 야만인들'
기업 소유 다툼 본질은 욕심… 직원들 희생 막아야
이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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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30 01:00 | 최종 수정 2024.11.30 0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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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임팩트=이상우기자] 올해 재계 최대 이슈 중 하나인 영풍그룹 장씨 일가와 최씨 일가 간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지켜보면서 읽은 책이 있습니다.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이란 책입니다. 912쪽이나 되는 분량에 압도돼 늘 중도 포기한 책이었는데 이번엔 생각보다 페이지가 잘 넘어갔습니다. 문 앞의 야만인들이 그리는 기업 내부 다툼이 고려아연 분쟁과 본질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어 내용 소화가 가능했습니다.
문 앞의 야만인들은 1980년대 말 미국 최대 식품기업으로 꼽히던 RJR 나비스코를 둘러싼 LBO(차입 매수) 전쟁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야만인은 회사를 두고 한몫 챙기기에 빠진 로스 존슨 RJR 나비스코 최고경영자(CEO)와 사모펀드 거물들을 뜻합니다.
존슨 CEO는 절제가 부족한 측면이 있지만 뛰어난 추진력과 명석한 상황 판단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RJR 나비스코 주가가 지나치게 저평가됐다고 여긴 나머지 욕심을 다스리지 못 하고 LBO 판을 벌이죠. 이에 따라 멀쩡하게 잘 돌아가던 RJR 나비스코는 사모펀드의 사냥감으로 전락했습니다.
고려아연 분쟁의 두 주역인 장형진 영풍 고문과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도 본질은 존슨 CEO와 다를 게 없습니다. 두 사람을 지배하는 건 고려아연을 갖겠다는 소유욕이지 거창한 대의명분이 아니란 얘깁니다.
그나마 분쟁 초반에는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와 손잡은 장형진 고문보다는 고려아연의 독자성을 내세운 최윤범 회장 쪽이 모양새가 좋아 보였습니다. 이제는 그렇지도 않죠. 최윤범 회장이 고려아연 주식 시장가보다 낮은 가격에 유상증자하겠다고 발표하는 바람에 소액 주주들이 등을 돌린 데다 금융감독원까지 불공정 거래 조사에 나섰으니까요. 결국 최윤범 회장은 유상증자를 철회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 꼴입니다.
개인적으론 누가 이기든 고려아연 직원들은 무탈하길 바라지만 낙관하긴 힘듭니다. 문 앞의 야만인들이 좋은 사례입니다. 존슨 CEO를 물리치고 RJR 나비스코를 차지한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는 LBO 과정에서 떠안은 빚을 정리하고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습니다. 사업부가 분할돼 팔렸고 많은 직원이 일자리를 잃었죠.
고려아연 분쟁의 양 당사자는 어떨까요. 그나마 최윤범 회장은 고려아연을 오랜 기간 경영해 온 최씨 일가 후계자인 만큼 조직을 헤집진 않을 듯합니다. 문제는 MBK파트너스입니다. 사모펀드 특성상 경영권을 확보한 뒤엔 단기간에 투입한 자금을 회수하고 이익도 내야 합니다. 그러려면 자산 매각, 인력 감축 같은 구조조정 카드를 꺼낼 수밖에 없죠.
MBK파트너스는 고려아연을 경영하게 되면 기업 가치 향상에 집중할 것이며 구조조정 계획도 없다고 밝힌 상태입니다. 정말 그리 해 줬으면 합니다. 한국판 문 앞의 야만인들인 고려아연 분쟁에선 자기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해온 이들이 무참한 꼴을 당하지 않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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