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경제 현지르포-일본편②] 인플레 불만 속출에 일본정부 좌불안석

최진우 승인 2024.05.06 03:00 의견 0

오사카의 한 식당 앞에서 고객이 가격표를 살펴보고 있다. [오사카=최진우 전문위원]


일본 엔화가치가 속절없이 떨어지면서 엔달러 환율은 한때 1달러=160엔을 기록했다. 엔달러 환율이 160엔을 넘어선 것은 34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1990년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엔화약세, 이른바 초엔저 현상은 일본경제는 물론, 일본인들의 일반생활에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출기업에는 호재로 작용하지만, 에너지 수입 등 수입물가에는 대형악재로 작용하면서 그동안 대표적인 물가안정국가로 유명한 일본의 위상을 뒤흔들고 있다. 엔저 덕분에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관광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숙박 및 외식물가를 끌어올려 관광업과는 상관없는 일본인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부작용에 시달리고 있다. 일본 현지취재를 통해 초엔저 현상을 겪고 있는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한다. <편집자주>

[오사카=최진우 전문위원] 일본의 엔화 가치가 속절없이 하락하면서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슈퍼엔저(엔화가치의 과도한 하락)로 인한 국내 물가불안이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독일과 함께 전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안정된 국가로 꼽혔는데, 최근의 슈퍼엔저로 인해 수입물가가 대폭 올라 국내 물가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에너지가격 상승이다. 아베 전 총리 재임시절에는 휘발유가격이 리터당 우리돈 1000원 정도였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가격이 50% 이상 올라 리터당 1500원을 넘어선 것이다.

오사카에서 오래전부터 자리잡은 재일교포 김세동씨는 “일본에 살면서 요즘처럼 물가상승을 체감한 적은 없었다”면서 “휘발유뿐 아니라, 전기세 수도세 등도 잇달아 오르면서 시민들의 부담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정부는 물가상승을 고려해 기업들에게 임금상승을 독려해왔는데, 임금상승률보다 물가상승 속도와 폭이 커지면서 아무리 임금을 올려도 뛰는 물가를 따라가기가 힘들어졌다는 푸념도 나온다.

취재중 만난 키무라 류노스케씨는 제약회사에 다니는데, 최근의 물가상승폭이 워낙 크다보니 월급이 올라도 체감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키무라씨는 “월급이 3% 정도 올랐는데, 물가상승률은 그 2배에 달하는 느낌”이라면서 “특히 에너지 관련 물가가 너무 올라 꼭 필요한 업무가 아니면 가급적 차량운행을 자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서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에 따르면 엔저현상이 지속되어 엔달러 환율이 170엔까지 오를 경우 실질임금 산출에 사용되는 물가상승률은 3.4%에 달해 임금상승률이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또 엔달러 환율이 160엔을 기록하면 수입물가는 8.7% 상승하고, 170엔에 도달하면 수입물가는 무려 13.5%나 치솟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려 34년만에 엔달러 환율이 155엔까지 떨어진 상황을 감안하면 엔달러 환율 160엔과 170엔도 비현실적인 얘기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에너지외에도 식품가격도 줄줄이 인상되고 있어 또다른 부담으로 작용한다. 신용정보회사 데이코쿠데이터뱅크에 따르면 이달 가격을 올리는 식품 품목은 417개로 지난해 같은 달의 절반 수준이지만, 인상률은 31%에 달한다고 밝혔다.

오사카의 번화가. [오사카=최진우 전문위원]


인상률이 30%를 넘어서는 것은 일본같은 저물가 사회에서는 과거같으면 상상도 못할 수치에 해당한다.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이자카야 가게를 운영하는 기무라씨는 “식자재가격이 올라도 너무 오른다”면서 “상대적으로 많이 오른 인건비까지 감안하면, 팔아도 별로 남는게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음식값을 슬그머니 올리는 가게들도 속출하고 있다. 관광객들이야 엔저효과 덕분에 가격이 올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겠지만, 일본인들의 생각은 크게 다르다.

이자카야 가게에서 만난 한 직장인은 익명을 전제로 “샐러리맨들은 음식값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면서 “가격이 오르면서 외식횟수를 줄이는 주변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정부도 엔화가치가 떨어져도 너무 많이 떨어졌다는 판단에 시장개입을 서슴치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엔달러 환율이 외환시장에서 160엔까지 치솟자 일본 중앙은행이 급하게 개입해 155엔까지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당시 시장에서는 중앙은행이 보유중인 달러를 풀어 환율안정에 나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일본중앙은행 측은 이에 대해 어떠한 코멘트도 하지 않았지만, 당시 시장개입에 들어간 달러규모가 50억달러에 달했을 것이란 얘기가 나돌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불과 5엔을 떨어뜨리기 위해 거의 4조5000억원을 쏟아부었다는 얘기인데, 환율시장에 개입하는 일본중앙은행의 고민이 얼마나 큰지 짐작케 한다.

일본은 엔화가치 하락 덕분에 관광객을 끌어들이고,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지는 긍정적 효과도 누리고 있지만, 실제 일반시민들이 체감하는 것은 에너지 가격과 외식비 상승 등 부정적인 측면이 더 강하다.

일본인들의 특성상 좀처럼 정치얘기를 하지 않는게 일반적이지만, 취재중 만난 30대의 직장인은 “최근 일본에서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집권당인 자민당 후보들이 전멸한 것도 이런 불만들이 밑바닥에 깔려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진단할 정도로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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