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2 전차의 아버지'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 인터뷰① "K2 개발 초창기부터 수출 고려"

이상우 승인 2023.12.24 11:30 | 최종 수정 2023.12.25 14:15 의견 0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사진 왼쪽)과 박종국 뉴스임팩트 편집국장이 대화하고 있다.@뉴스임팩트

[뉴스임팩트=박종국·이상우기자] 방위산업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하자, 불량, 담합, 정치권과의 결탁, 비밀리에 오가는 뇌물…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지만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방산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방산은 골칫덩어리에서 효자로 거듭났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국내 방산 제품을 사들여서다. 어느새 방산은 국가 경제를 책임질 전략 사업이 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하나 때문에 방산을 둘러싼 분위기가 바뀐 건 아니다. 수많은 이가 오랜 기간 외풍에 휘둘리지 않고 연구·개발과 수출에 매진해 왔기에 방산이 성장세를 구가할 수 있었다.

방산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주역 가운데 한 명이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이다. 그는 1954년생으로 서울대 공대를 졸업한 뒤 미 MIT에서 재료 공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9년 국방과학연구소(ADD)에 입사해 장갑차와 전차 개발을 완수하고 아주대학교 시스템공학과 교수를 거쳐 2020년부터 현대로템 고문을 맡고 있다.

K200 장갑차 구조와 배치 설계 담당 연구원, K1A1 전차 개발 체계실장, K2 전차 개발단장을 역임한 'K2 전차의 아버지' 김의환 고문. 한국 지상기동전투장비 개발의 산증인인 그를 뉴스임팩트가 만나 전차 개발과 방산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의견을 들었다.

김의환 현대로템 고문.@뉴스임팩트

-서울대와 MIT를 나왔는데 ADD로 진로를 잡은 이유가 뭔가.

"1979년에 ADD에 간 건 병역 특례 때문이었다. 5년간 K200 장갑차 체계 종합 설계에 참여했다. 프로젝트를 끝내고 ADD에 적을 둔 채 미국에 유학 갔다가 돌아왔다. 장갑차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무기 체계 설계 개발에 대한 공학적 창조의 재미와 자긍심을 많이 키웠다."

"ADD가 아닌 다른 직장을 잡으려면 잡을 수 있었다. 미국 대학 연구소를 비롯한 다양한 조직에서 잡 오퍼(Job offer·일자리 제안)가 들어왔다. 하지만 아내가 중요한 얘길 하더라. 어렵게 익힌 학문을 나라를 위해 써야지 미국에서 뭘 하느냐는 거였다. 미국 주류 사회의 장벽이 높은데 굳이 미국에서 살아야 하냐는 생각도 있었다."

-1970~80년대는 고도 성장기여서 기업 쪽으로 갔으면 큰 부를 쌓고 높은 지위에 올랐을 텐데 왜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나.

"사회적으로 잘나가는 동문이 많지만 내 갈 길을 간다는 소신이 있었다. 우리나라 고유 전차를 독자 개발하겠다는 공학자로서의 목표 성취와 국가 안보를 뒷받침한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아내 영향도 컸다. 아내는 친구 남편이 돈을 많이 벌더라 같은 소리를 일절 하지 않겠다고 했다. 나랏일 하는 남편을 돕겠다며 열심히 지원해 줬다."

K200 장갑차.@출처=연합뉴스

-K200 체계 종합 설계에선 어떤 역할을 했나.

"K200의 외형과 배치를 설계하고 물에 띄우는 임무를 맡았다. 1970년대는 개발 환경이 열악하고 설계 경험도 없어서 장갑차를 물에 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 장갑차 중량과 부피를 정밀하게 계산하고 레이아웃(배치)을 잡은 끝에 K200을 물에 띄우는 데 성공했다."

K1A1 전차.@출처=연합뉴스

-K1 국산화는 어떻게 이뤄냈나.

"K1은 미국의 설계 지원을 받아 개발한 전차다. 미국이 기술을 전수해 주면 좋은데 안 주더라. 어떻게 기술을 국산화할지 계속 고민했다. 그러다 K1 성능 개량 사업을 시작했다. K1을 K1A1으로 바꾸는 프로젝트인데 이 기간에 중요 기술과 부품 대다수를 국산화했다.

"조준경(照準鏡·사격과 관측을 위한 전차의 눈)을 비롯해 다양한 전차 부품을 국산화했다. 핵심은 120㎜ 주포와 포탄이었다. 서방국들과의 포탄 호환성 때문에 초기에는 포만 도입하여 사용했으나 결국에는 우리 기술로 개발한 120㎜ 포로 바뀌었다."

-전차에 장착할 포를 만드는 게 그렇게 어렵나.

"기술을 어디서도 주지 않으니까. 포와 포탄은 궁합을 맞춰 동시에 최적화하며 개발한다. 궁합이 맞지 않으면 포탄의 고압과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포가 깨지거나 탄이 일정하게 날지 못한다. 빠른 포탄은 속도가 마하5(시속 6120㎞) 이상이다."

"기술을 어떻게 익혔다고 해도 거기서 끝이 아니다. 전차에 장착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전술 운용에 맞게 여러 가지 포탄도 만들어야 한다. 포는 구경과 길이가 늘어나면 파괴력이 대폭 증가한다. 탄약이 터져서 탄두를 쭉 밀어줄 때 더 멀리 가고 관통력, 명중력도 향상된다. 포가 지나치게 길면 탄이 휘거나 땅을 찍을 수 있어 마냥 길게 만들 수 없는 점은 감안해야 하지만 말이다."

-미국이 K1A1 사업에 대해 제안한 건 없었나.

"K1을 우리 힘으로 성능 개량하겠다고 하니 뒤늦게 미국에서 자기들이 해주겠다고 하더라. K1을 자기들이 설계한 만큼 우리가 작업하기 어려울 테니 맡기라는 얘기였다. 기술 이전은 꺼리면서 성능 개량 사업은 하겠다는 심보가 괘씸했다. 실패해도 우리가 실패해야 기술 자립이 가능해진다는 각오로 밀어붙였다. 기술·부품 개발과 탐색 개발을 맡은 ADD, 체계 개발을 담당한 현대로템의 공이 컸다."

K2 전차.@출처=연합뉴스

-K2 개발은 언제 시작했나.

"1995년 시작했다. 3년간 개념 연구를 했고, 그 뒤 5년 동안 탐색 개발을 했다. 개념 연구를 통해 확립한 전차 콘셉트가 공학적으로 가능하도록 기술과 부품을 개발하고 K2의 형태를 정의하는 것이 탐색 개발이다. 이후엔 실제 전차를 만들고 평가하는 체계 개발을 했다. 2008년 프로젝트가 마무리됐다."

-K2 개발이 무모하다는 반대 의견은 없었나.

"그런 우려를 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많은 이가 독자 개발의 열성을 믿고 지원해 줬다. K1A1 사업의 성공이 설득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생각한다. K1A1으로 기술과 부품 국산화도 해 보고 전차 시스템 기술도 독자적으로 수행하면서 자신감이 생겼다. 군·산·학·연 모든 기관이 열심히 힘을 보탰다."

"제게 K2 개발은 반드시 미션 컴플리트(임무 완료)해야 할 평생의 과업이었다. 같이 일하는 ADD 연구원들을 독려해 가며 무수히 밤을 새웠다. 이런 과업을 믿고 맡겨준 상사들, 같이 호흡해 준 동료 연구원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보낸다. 기술을 더 배우고자 전 세계에서 유명한 전차 전문가 5명을 초빙해 일주일씩 세미나를 들었다. ADD 연구원 여러 명을 영국에 보내 전차 전문 기술 공부를 시키기도 했다. 지금도 저와 우리 팀을 믿고 전차 전문 교육을 받도록 지원해 준 국방부 담당자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K1A1 제작을 해낸 상황에서 더 익혀야 할 기술이 있었나.

"전차를 생산하는 것과 개발하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다. K1A1을 통해 여러 기술과 부품 개발을 경험했지만 K1 전차 일부를 개량하는 수준이었다. 신형을 개발하려면 전차에 대한 기술적, 전술적 이해가 완벽해야 한다. 적의 대전차 위협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앞으로 출현할 새로운 기술은 무엇인가, 전차 전투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에 대응한 전차 체계를 설계 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군은 K2가 무조건 북한 전차를 이겨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수출이 가능한 최고 반열에 오르려면 미국이나 독일, 영국과 비슷한 수준이거나 그 이상으로 올라와야 했다."

-K2 전차 개발에서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기술적, 사업적 리스크를 어떻게 짊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기술적으로는 최고의 전차 체계를 개발하기 위한 전차 체계 기술을 갖춰야 했다. 최적화와 균형을 이룬 전차를 최고의 부품 기술을 사용해 만들어 내는 일이다. 시스템 공학을 통해 난제를 풀어냈다."

"사업적으로는 K2 개발비를 정부가 대줄 수 있는지, 산업 인프라가 충분한지, 개발 실패 리스크를 누가 감당할 것인지, 모든 면을 무척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정부, 군, 현대로템을 비롯한 방산 기업들, ADD가 한마음 한뜻으로 협력했기에 K2가 완성될 수 있었다. ADD가 사업을 이끌면서 외쳤던 캐치프레이즈는 '세계 속의 으뜸 전차 우리 손으로 만든다'는 거였다. 당시 어느 한쪽이라도 삐끗했으면 사업은 큰 차질을 빚었을 거다."

지난해 8월 열린 K2 수출 계약 체결 행사에서 악수 중인 이용배 현대로템 사장(사진 오른쪽)과 마리우시 브와슈차크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출처=연합뉴스

-K2가 수출될 거라고 예상했나.

"K2 개발을 시작할 때부터 수출을 고려했다. 연구개발비만 수천억원을 들여 K2를 만드는데 이왕이면 해외에 팔 수 있는 전차를 제작하고 싶었다. 수출을 위해서라도 독자 기술 사용에 많은 힘을 쏟았다. 모든 부품과 시스템을 국산화해야 기술 소유권을 우리가 가질 수 있으니까. 사가겠다는 임자는 없었으나 이렇게 개발하면 반드시 기회가 올 것으로 생각했고 개발이 끝나면 K2 들고 세계에 돌아다니며 수출해 보고 싶은 꿈이 있었다."

-수출에 어려움은 없었나.

"전차 수출 이력이 전무한 한국이 새로 개발한 전차를 해외에 판매한다는 것은 전례 없는 시도였다. 그 첫발은 K2 개발이 끝나기도 전에 시제품만 가지고 터키와 계약을 한 일이다. 터키 알타이 전차의 설계 개발을 도와주고 양산 시 부품을 수출하는 모델이었다. 이는 미국이 K1 사업을 한국에 지원해 준 모델과 아주 유사하다."

"현대로템에서 많은 인력을 터키에 파견해 해외 비즈니스의 문을 열었다. 현재 터키는 알타이 전차 양산을 위해 엔진, 변속기, 서스펜션(차량에서 차륜과 차체를 연결하는 장치) 등을 한국에서 사 가고 있다. K2 전차가 양산되고 있는 현재는 전통적 전차 강국 미국, 독일과 국제적으로 경쟁하고 있으며 최근 폴란드에 완성 전차 수출 계약을 맺어 납품하고 있다. 그 외 여러 나라와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다음 기사에서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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