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 수도권 사람들이 등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가장 많이 가게 되는 산이 북한산이다.
일단 면적이 넓다. 종로구를 비롯한 서울시 5개 구와 경기도 고양시, 의정부시, 양주시에 걸쳐 있다. 어디서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북한산의 최고 자랑거리다.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수도 서울에 있는 산이라는 점 때문이다. 북한산 소개에서 외국인들이 크게 부러워한다는 단골 멘트다.
오래전 도봉산에서 외국인이 물었다. 산 이름이 뭐냐고. 도봉 마운틴(mountain)이라고 했다. 그러자 북한산은 어디냐고 물었다. 도봉산 옆이 북한 마운틴(mountain)이라고 했다. 외국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한에 왜 북한 마운틴이 있냐고. 그때는 답을 못했다. 그때 산행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도봉산과 북한산을 합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부르고 있는데, 2013년 문화재청은 북한산 영어 표기를 Bukhansan Mountain(북한산 마운틴)으로 정했다. 로마자 표기와 의미역 표기를 함께 쓰는 건데, 그래도 의문은 가시지 않는다.
남한산성은 남한의 남한산에 있으니 곧바로 이해되는데, 반대급부로 생각할 수 있는 북한산은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다. 잠깐의 공부가 필요하다.
북한산 자료를 보면, 백제에서는 한산(漢山)이라 불렸고 475년 고구려가 이곳을 정벌하여 북한산군(北漢山郡)이라 칭했다고 한다. 553년에는 신라가 정벌하고 난 후 일시적으로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고 이때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세워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고려의 중흥산성을 보수하여 북한산성을 축성했는데, 이때 한성(漢城)의 북쪽이라는 의미에서 북한산(北漢山)이란 산명을 별칭으로 사용해 오다가 행정 편의상 일제강점기 이후로 북한산(北漢山)으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온 북한산의 한(漢)은 한수(漢水) 漢으로 한강을 지칭한다고 한다. 그래서 북한산은 산 이름이 아니라 한강 이북의 큰 산을 의미하는 일반명사 또는 지명이라고 볼 수 있다는데, 북한의 한(韓)은 나라 韓으로 한자를 알면 북한산과 북한은 연결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는 금방 해결이 되는데, 북한산 이름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삼각산(三角山) 개명 의견을 내놓는다.
우리 조상들은 오랫동안 북한산과 삼각산을 같이 써왔다고 하는데, 삼각산이 우리 뇌리에 깊숙이 각인된 건 “가노라 삼각산(三角山)아 다시 보자 한강수(漢江水)야 / 고국산천(故國山川)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시절(時節)이 하 수상(殊常)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는 김상헌의 시조 때문이다.
사느냐 죽느냐 그 갈림길에서 죽어도 선비의 지조를 지키겠다는 결연함이 배어 있는 시조를 읊으며 뿔처럼 솟아 있다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를 바라보면 북한산보다는 삼각산이 전하는 정기가 살아있는 기운으로 다가오는 건 있다.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이고 있는 흰빛의 화강암 봉우리가 보는 이의 마음을 강인하게 추동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산이냐 삼각산이냐 두 이름을 왔다 갔다 하며 북한산을 정말 많이 다녔는데, 일 때문에 북한산 둘레길 1구간인 소나무 숲길 구간을 반대 방향으로 가보게 되었다.
100년 된 소나무가 1000그루가량 자라고 있다는 솔밭공원에서 시작해 우이령길 입구까지 걷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소나무 생각을 가장 많이 하게 되었고, 우이동 만남의 광장 포토존에서 소나무 사이로 삼각 봉우리를 사진에 담는 순간 올해 초 보았던 ‘<히든 어스> 한반도 30억 년’ 다큐가 그곳 풍경으로 겹쳤다.
그것은 북한산이냐 삼각산이냐 하는 인간의 역사를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1억 7천만 년 전의 자연사였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북한산 모습이 그때 대략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라는 역사가 쓰일 수 있는 생명의 태동이 상상하기 힘든 그 오래전 지각변동으로 가능했다는 해설에 모두가 심혈을 기울여 주장하고 만들어 가는 역사가 바위와 흙을 만드는 물과 바람보다 연약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서울은 화강암의 도시입니다." <히든 어스>가 정의한 서울이다. 즉 서울의 모든 산은 화강암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인데, 중생대 쥐라기에 서울 지하에서 분출하지 못한 마그마가 식어 그대로 화강암이 되었고, 화강암을 덮고 있던 암석들이 침식으로 사라지면서 화강암 속살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고 한다.
삼각 봉우리는 같은 시기에 함께 솟았지만, 그 모양이 다른 이유는 절리(節理) 때문이라고 한다. 수직 방향의 절리로 인수봉 같은 큰 봉우리가 되었고, 여기서 다시 바위의 쪼개진 틈이 양파 껍질 벗기듯이 뜯겨 나가면서 기암괴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즉 절리의 약한 부분을 가차 없이 뜯어낸 자연 작품이 준 풍경에 인간종(種)은 아무 기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래도 우리가 크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건 바위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 때문이다.
화강암과 푸른 소나무가 만들어 낸 경이로운 대비에 이끌려 산수화의 주된 소재가 된 이유가 여럿일 텐데 그중 앞세울 수 있는 건 생명이 자라기 힘든 곳에서 사시사철 푸른 생명이 던져주는 신비로운 생기(生氣) 때문이지 않을까.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충분히 알려주는 등불 같으니까 말이다.
화강암이 풍화되어 만들어진 흙이 바위틈에 쌓이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흙이 바람에 날아와 쌓이기도 한 그 비좁은 공간에 솔씨 하나 날아와 싹을 틔우고 소나무로 자라는 생명의 여정, 영상으로만 본 감동을 멀리 삼각봉을 보며 가늠해 보니 심장이 터질 듯했다.
그것은 지나온 길에서 만난 여운형, 손병희라는 역사적인 인물을 만든 원동력이 바로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가 준 태고의 기운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소나무는 생태 특성상 맨땅에 씨앗이 떨어져야 싹이 트고 활엽수 속에서는 맥을 못 추는데 인간이 땔감용으로 숲 바닥의 낙엽을 긁어내고 활엽수를 제거함으로써 소나무에 좋은 생육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사회가 도시화, 산업화됨에 따라 농촌 인구가 줄어들면서 소나무 숲에 대한 인간의 간섭도 차츰 사라지게 되자, 참나무류를 비롯한 활엽수들이 식생천이의 질서에 따라 소나무의 생육 공간을 잠식하고 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에 나오는 글이다. 즉 민족수, 생명수, 신목, 서낭나무, 비보림, 수구막이로 아직까지 가장 높은 대우를 받고 있는 소나무는 농경문화의 시작으로 한반도에서 번성하기 시작했고, 농경문화의 쇠퇴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소나무가 생명과 장생, 절조와 기개, 탈속과 풍류, 생기와 길지 등의 사상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결정적 시기는 조선시대였다고 하는데, 지구상에 소나무류가 등장한 건 1억 7천만 년 전, 한반도에서는 1만 년 전, 그리고 약 3~4천 년 전 농경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소나무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이들은 불어난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참나무, 서어나무 종류 등으로 이루어진 넓은잎나무숲에 불을 질러 농경지를 넓혔다. 이렇게 생겨난 농경지의 주변 또는 버려진 화전(火田)을 중심으로 소나무는 무리 지어 영토를 확보해 나갔다."
<궁궐의 우리 나무>에 나오는 글인데, 불쑥 보면 소나무는 버려진 땅을 선호하는 개척자의 정신을 닮은 것도 같지만, 소나무가 척박한 토양에서 잘 자라는 건 척박한 토양을 처음부터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햇볕을 가리는 나무를 피해서 살려다 보니 그렇게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비옥한 땅에 솔씨가 뿌려지면 척박한 곳보다 더 잘 자란다고 한다.
나무들은 초기에 자라기 시작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햇볕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는데, 강한 빛에 잘 자라는 극양수인 소나무, 거침없이 햇볕을 받을 수 있는 하늘 아래 가까운 봉우리 틈에서 뿌리를 내릴 흙만 있다면 무조건 삶을 시작하는 소나무, 그 위대한 투혼을 보고 누가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것인가?
북한산이냐 삼각산이냐, 두 이름을 거슬러 올라간 ‘서울은 화강암의 도시입니다’라는 멘트와 위태로우면서도 전혀 위태롭지 않은 화강암 바위틈의 소나무들, 그 자연사적 진전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조금 긴 세월이 걸린 것 같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이전에 가봤다고 하더라도 다시 틈틈이 화강암과 소나무를 향유하며 수십 억 년은 아니더라도 수억 년 지구를 느끼며 걷도록 하자. 그게 자연이 준 위대한 가르침이기에.
[김서정 작가 소개]
1990년 단편소설 <열풍>으로 제3회 전태일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가 된 뒤, <어느 이상주의자의 변명> <백수산행기> <숲토리텔링 만들기> 등을 출간했고, 지금은 숲과 나무 이야기를 들려주는 숲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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