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정의 숲과 쉼] 생명과 죽음을 각각 지니는 강원도 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의 주목들

김서정 승인 2023.05.22 10:58 의견 0

[뉴스임팩트=김서정 숲 해설가 겸 작가]발왕산 천년주목숲길을 걸어보기 위해 국내 최장 거리라는 관광케이블카를 홀로 타고 오르는데 바람에 밀려 움찔 흔들거린다.

날씨를 봐서 7.4km 가는 동안 요동치는 현상이 서너 번 있을 법하자 이러다 멈추거나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사이로 그래 힘들더라도 걸어서 올라갈 걸 하는 후회가 훅 파고든다. 하지만 정상까지 두세 시간은 걸릴 거라는 안내원의 말에 하산까지 고려한 탑승은 핑계고 산을 덮은 문명의 이기로 답사 욕심을 채우려는 저질 체력이 정답이다. 거기에 개발과 숲 보호는 끼어들 틈이 없다. 죽기 전에 이름 난 주목을 꼭 봐야겠다는 능청스러운 욕심만 있을 뿐이다.

월간 <함께 사는 길>을 보면, 환경운동가이자 목사인 장석근은 “사실 환경 사안의 제일 끝에 가면 인간의 욕심이 남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의 욕심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 욕심은 창세기 1장 28절에 나와 있는 ‘땅을 정복하라’라는 말을 사람들이 잘못 해석해서 시작된 것이란다. ‘땅을 정복하라’는 자연을 지배, 착취, 관리하는 게 아니고 자연이 우리를 돌보고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한다는 것이란다. 즉 자연은 함께 살아야 할 대상인데, 적정선을 넘어 과도하게 침범하는 게 인위를 앞세운 욕심 때문이라는 것 같다.

언젠가 뜨악하게 보던 관광케이블카를 타고 있는 이 순간, 보기만 해도 천 년을 살 것 같은 기대를 버릴 수 없어 오르는 비열함이 징글맞게 덤벼도 사람은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라 합리화하는 동물이라는 말에 타협하는 몰골이 초라해 보이다 못해 저급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오르고 있는 몸을 저주할 수 없어 애면글면 관광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스카이워크에서 강원도 험준한 산들을 보고는 호쾌하게 숨 한 번 쉬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년주목숲길로 향한다. 오직 천 년, 천 년, 주목, 주목, 하면서!

천년주목숲길은 그 이름이 생기기 전 천 년 아니 그 이상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는데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관광 개발하는 과정에서 데크길을 만들었고, 이제는 예고 없이 불어오는 강풍에 긴장을 하는 능선 아래로 내려가면 등산화를 신지 않아도 차분하게 수식어가 붙은 주목들을 만날 수 있다.

‘8왕눈이주목’은 “안목을 키워 요목 조목 새기고, 면목을 갖춰 주목을 받습니다. 명목을 가진 제목으로 이목을 이끄는 챔피언이 됩니다. 8왕의 덕목을 갖춰 이 시대의 챔피언이 되세요”라는 뜻으로 발왕산 유래와 관련이 있단다. 본래 여덟 왕의 묏자리가 나올 수 있는 팔왕산에서 발왕산이 되었다고 하기에. 다음으로 ‘종갓집 주목’은 “다른 주목과 다르게 삼대가 살고 있는 1500년 수령의 나무입니다”라는 뜻이고, 속이 썩어 비어 있어도 잘 자라고 있는 ‘고해주목’은 한 사람이 들어가 고해성사를 하기에 딱 알맞은 형태이고, 마가목을 품고 자란다고 해서 ‘어머니왕주목’으로 불리는 주목도 있다.

천년주목숲길의 고해주목@연합뉴스


1천미터 이상에서 잘 자라는 주목이라 오래 걷지 않고서는 고색창연한 주목을 보기가 힘든데, 동네 공원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듯한 노력에 대한 응답이어서 그런지 몸으로 보는 주목이 아니라 오로지 눈으로 보는 주목에 감동이 사그라질 무렵, 그곳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1800년 추정 수령의 ‘아버지왕주목’을 만나게 된다. “든든한 아버지의 어깨를 닮은 웅장한 수형에서,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신 아버지의 굳건한 기개가 느껴진다”는 상징이 있어서 그런지 저마다 한 번씩 안아보는 모습 앞에서 숙연해진다. 그래, 고난과 역경에도 오래 살아야, 그래야, 모두가 행복해지기에.
보기만 해도 만지기만 해도 천 년의 에너지를 줄 것 같은 주목이 살아 천 년을 간다는 거는 그늘에서도 잘 자라는 음수(陰樹)라 가림막 없이 광합성을 하기 위해 빨리 키를 키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천히 자라는 데 이런 나무들은 조직이 단단해 오래 살 수 있다. 죽어 천 년과 관련해서는 <궁궐의 우리 나무>를 보면, “주목 목재는 결이 곱고 붉은색이 아름다우며 잘 썩지 않는다. 그런 특성 때문에 시신을 감싸는 관재로서는 최상품 대접을 받았다”면서 낙랑고분의 관재, 경주 황남동 금관총의 목곽 일부, 공주 무령왕릉의 왕비 시신이 베고 있던 두침 등이 주목이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주목은 천 년을 넘어 2천 년까지 썩지 않은 나무라는 게 입증이 되었는데, 관재로 주목을 썼던 건 잘 썩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주목의 붉은색이 잡귀를 내쫓고 영원한 내세를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서양에서도 주목이 관재로 쓰였다고 하는데, <길고 긴 나무의 삶>에서 ‘주목’ 편을 보면, “주목은 어떤 점에서 더 깊은 공포를 일으키는 것일까? 나무의 독성보다는 생김새와 위치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묘지에 서 있는 주목의 어둑한 모습은 유럽 문화의 오랜 일부다”라고 하면서 “주목은 짙은 어둠에서 자란다. 오래된 교회 건물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무성하게 자란다.

한편 옹이 지고 뒤틀린 주목 줄기를 보면 비틀린 인간 형상이 쉽게 떠오른다.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리거나 촬영했을 때 주목은 음울한 분위기를 어김없이 창조한다. 유령 이야기에도, 고딕 호러에도, 시대극의 우울한 무덤 장면에도, 범죄 시리즈의 긴장감 넘치는 순간에도 등장한다”라는 글이 있다. 우리는 주목을 보면서 영원할 듯한 싱싱한 생명을 생각하는데, 서양은 이승의 공포스러운 죽음과 관련을 짓고 있다.

서양식 사고로 주목을 마주하면 친근감 있는 수식어도 붙일 수 없고, 더더군다나 얼른 다가가 껴안고 만지며 천 년의 에너지를 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동양의 우리는 고산의 주목을 우리 일상으로 과감히 끌어왔다. 아파트관리신문에 실린, ‘조경수목, 주목’을 보면, 부제가 ‘도심 지역 조경수로 활용, 차폐 ․ 울타리용으로 적합’이었다. 본 내용 일부를 보면, “쓰임새가 다양한 주목은 1천 미터가 넘는 산의 능선에서 잘 발견되며, 최근에는 도심 지역의 조경수로 활용되고 있다”라는 글이 있다. 나무껍질과 속살이 붉어 붉을 주(朱), 나무 목(木), 주목으로 불리는 주목이 이제 정원수로 관심의 주목(注目)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래서 더 안날이 났는지도 모른다. 아파트를 오며가며 보는 주목은 거실에 장식하는 크리스마스트리 크기 정도라 작은 소나무인 줄 알고 휙휙 지나다니다가 가을에만 잠시 멈춰 선다. 열매를 감싸고 있는 빨간 가종피 때문이다. 은근슬쩍 그것을 입에 가져가기도 하지만, 화단 어딘가에 우두커니 서 있는 주목에서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의 의미도 묻어나지 않고, 죽음과 공포의 그림자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그저 조경용으로 심은 숱한 나무 가운데 하나인 장식품일 뿐이다. 그래서 고산의 주목을 만나고 싶었는데, 그래서 감격스러웠는데, 오르는 길에 다가온 생각이 덜컥 발목을 잡았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편하게 1800년의 세월을 느껴도 되나.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돌봐. 자연이 우리를 돌보지. 동양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 안에 인간이 있는 거다.”

장석근 목사의 말에 찔려서일까? 이따금 텅 비어 내려가는 관광케이블카를 올려다보며 내리막길을 걸어서 가본다. 이렇게 하면 산에 오르려는 케이블카 반대 시위에 서명이라도 할 수 있을까? 이미 타고 올랐는데. 이 모순의 순간을 피하려면 고산의 주목을 포기하거나 저질 체력을 단련시키거나 해야 하는데, 그 경계에서 위태롭게 하산을 한다. 욕심이라는 그 무한의 그릇을 어찌 조여야 할지 제대로 보려고 잠시라도 안간힘을 쓰는데, 아픈 다리 사이로 풀풀 먼지만 인다. 그 먼지 사이로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 애를 써보는데 천년의 주목이 비틀거린다. 그 오래된 주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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