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울의 독일편지 11편] 안락사에 대한 철학적 논의

그리고 이 가장 당연한 것, '죽음'은 어찌하여 논쟁의 불씨가 되었는가

김서울 승인 2022.08.04 16:41 | 최종 수정 2022.08.04 20:02 의견 0

독일 화가인 Hans Bildung Grien의 'Die Lebensalter(삶의 단계)'. 당시 유행했던, 죽음의 필연성을 예술로 풀어낸 바니타스 화의 일종이다.=Meisterdrucke


안락사에 대한 철학적 논의

[뉴스임팩트=김서울 재독 칼럼니스트] 생명권이 과연 포기할 수 있는 권리인지를 따져보기 전에, 우리는 ‚권리’라는 개념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권리를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첫째로 어떤 것에 대한 자유란 (스텔의 정의에 따라) 어떤 A에 대해 요구받지도, 금지당하지도 않는 상태를 말한다.

둘째로 이익 추구란 권리 성립의 근간 (나는 권리라는 개념이 이익추구라는 근간에서 비롯되었고, 본래부터 인간에게 부여된(천부인) 무엇이 아닌, 기나긴 시간을 거친 가시적, 그리고 비가시적인 사회적 합의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공리(Utility)인지 그저 한 개인의 이익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공리 추구에 어긋나지 않는 이익추구라고 정의하겠다.)을 뜻하는데, 이때 추구란 다른 이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실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마지막 법적으로 보장됨은 어떤 ‚할 수 있음’이 ‚권리’라고 지칭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때문에 권리란 다른 사람에게 직접적, 일차적인 명백한 피해를 유발시키지 않는 한에서 성립한다. 법치국가에서 법이란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누군가를 다치게 할 권리를 법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런 권리를 모든 국민들이 가진다면, 국가 전체의 이익을 도모하는 데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임은 명백하다.

또 이런 권리의 종류는 적극적 권리와 소극적 권리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적극적 권리 개념은 단지 방해받지 않고 실행할 수 있음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 실행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타인에게 요구할 수 있음도 내포한다.

이를테면 신체의 자유는 많은 경우 소극적 권리로 취급되는데, 내가 걸어서 어디를 가든 위법 상황이 아닌 이상 누구도 방해할 수가 없지만, 나를 목적지까지 옮겨달라고 길가는 행인에게 요청하는 것을 그가 들어줘야 하는 의무는 없다. 그가 나를 억지로 막고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면 처벌 받을 수 있겠지만, 내가 이동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법정에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권은 어디에 속하는 권리일까?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나는 소극적 권리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 눈 앞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치자. 나는 너무 무서워 그만 도망치고 말았고 피해자를 살리는데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법률적인 의미의 죄인인가? 아니다.

또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 눈 앞에서 어떤 사람이 갈증과 허기에 죽어가고 있다. 총 10명의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갔으나 아무도 음료나 먹을 것을 나누어주지 않았고, 결국 그는 사망하고 말았다. 그 10명의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는 있지만, 법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도와야 한다는 것이 법적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한국 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 자살방조죄(한국의 경우 동반자살 후 혼자만 살아난 경우에도 적용된다) 나 촉탁승낙살인죄(자신을 살해해달라는 요구에 따른 살인)등이 존재하며, 사망자의 의지에 따른 죽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 처벌을 받게 된다. 왜 유난히, 자신의 생명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에 문제가 발생할까?

그 이유는 불명확함에 있다. 누군가의 의사에 반하여 그를 죽이는 것은 명명백백히 살인인지라 더 따져 볼 것도 없기에, 이런 경우에 원론적인 차원에서는 그닥 논의거리가 될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의사에 따라주거나, 스스로 따르게 두는 것은 피해-가해의 일방적인 권리 침해 구도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 스스로가 가진 권리들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연 생명권이 스스로 포기 가능한 권리냐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포기 불가능한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 나는 권리를 ,자유롭게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법적으로 보장받는 권한’이라고 정의했다. 그런데 만약 어떤 권리가 포기할 수 없는 권리라면, 이는 권리의 정의 중 두 가지에 위배된다. 첫째는 자유고 둘째는 이익이다. A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수 없게 된다면, 그 권리는 ‚A에 대한 할 수 있음’인 동시에 ‚A를 해야만 함’이 되기 떄문이다. A에 대한 자유란 A에 대한 금지/의무 모두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이는 자유의 개념에 위배된다. 또한, A에 대한 자유가 없는 상태에서의 ‚할 수 있음’은 행위가 행위자에게 해를 가져다주는 상황에서도 적용되므로, A의 소유자는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그 권리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없게 된다. 결국 그것은 소유자에게 있어 짐이며, 그저 법적으로 규정된 의무에 불과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생명권도 포기 가능한 권리라는 것을 납득하면, 생명권을 포기 불가능한, 절대적인 무엇으로 여겼을 때 다른 권리들이 얼마나 심각하게 저해당하고 있는지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 법에서만 보자면 이와 관련한 기본권으로는 생명권, 행복 추구권, 평등권, 건강권 등이 있을 수 있다. 생명권은 당연하고, 행복 추구권을 ‘적극적/소극적인 측면 모두에서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릴 권리’라고 정의한다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생존보다 행복에 가까운 일인 안락사를 법과 제도의 관리 하에서 안전하고 체계적으로,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실행할 수 있도록 국가에 요청할 수 있다. [2편에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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